독서일기

2019-11-17
뇌는 둥글지...... 그것이 둥근 이유는 두개골이라는 것이 아름답고도 단단한 구의 형태로 닫혀 있기 때문이야. 두개골이라는 틀이 있기에, 그것이 고유한 형태로, 저마다의 패턴으로 완벽하게 닫혀 있기에 뇌는 둥근 형태로르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말하자면 삶의 형태로...... 틀을 벗어나면 뇌는 그저 맥없이 풀어지는 구불구불한 끈일 뿐. 각각의 두개골은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 있지.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가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패턴으로. 각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한개의 두개골, 그것이 붕괴되었을 때 세계는 유일했던 한가지, 방금 부서진 그 패턴을 상살한다. 억겁으로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을 그 패턴을.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 상실쯤 세계에...... 그런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그냥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dd의 패턴은 아름다웠겠지. 만인 속에서도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얼굴 속에서 고유하게 맞물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 그것은 유일하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두번은 만날 수 없는...... 그것이 내 곁에서 슥 사라질 때, 슥 빠져나가 멀리, 튀어 오르는 빗물로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던 검은 길 위로 내동댕이쳐지기 직전에, 나는 dd를 붙들고 있지 않았고 이윽고 모든 것이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항상 오가던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결과이기는 한 걸까.

...

그것을 골똘하게 내려다보며 d는 바깥인데 조금도 바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방에 틀어박혔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으나 여기는 여전히, 어딘가의 안쪽이고, 작은 주머니에서 조금 덜 작은 주머니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가 놀랍도록 친밀하고도 구태의연했다. 그리고...... 그렇다 당신의 말씀 그대로, 이 방은 본래 이러했다.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d는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금속 창처럼 양쪽 귀를 꿰뚫는 것이 있었다. d는 그간의 흔적들이 멀고도 긴 궤적을 그린 끝에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느꼈다. 세계는 잡음으로 가득했다.

⌈d⌋
<디디의 우산> 황정은 연작소설, 창비




 
2019-10-31
파묘

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이순일은 여러 차례 그렇게 말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 11월 둘째 주였다. 한세진은 아침 여섯시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고 별다른 막힘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려 이순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셔터를 내린 차고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엔진을 끄자 바로 시트가 식었다. 추운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기온이 조금 오르겠지만 그날의 목적지는 군사분계선 근처였고 이맘때 그곳의 한낮은 여기 밤보다 추웠다. 매년 그랬다.
한세진은 드나드는 차들의 무게로 들뜨고 부서진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다시 묶은 뒤 사층으로 올라갔다. 이순일이 짐을 다 꾸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녹두전, 고추전, 고기볶음을 담은 밀폐 용기, 사과, 배, 술 한 병을 담은 종이가방과 그보다 작은 배낭 한 개. 이순일은 이번엔 그릇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로폼이나 은박 말고, 진짜 접시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한세진이 배낭을 집어들자 안에 든 접시들이 묵직하게 늘어지며 왈그락 소리를 냈다. 아마 깨질 거라고, 깨져도 괜찮은 그릇들이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왜 깨지냐고, 조심하면 깨지지 않는다며 도로 가져올 그릇들이라고 답했다. 한세진은 더 말하지 않고 짐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황정은 '파묘'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황정은은
다른 단계로 넘어간 것 같다.
<디디의 우산>에 실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조금 했는데.



 
2019-10-30
나는 욕을 하는 남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저이가 왜 저렇게 되었을까? 비는 멈추지 않았고, 새벽에 냉장고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남편의 좋았던 모습을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군고구마를 품에 안고 오던 어느 겨울밤. 그런 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자꾸만 미친놈 미친년 하고 욕을 하는 모습만 떠올랐다. 삼 년 전에 담근 마늘장아찌를 버렸다. 내가 감기에 안 걸리는 건 매일 마늘을 다섯 쪽씩 먹기 때문이야. 남편은 마늘장아찌를 먹을 때마다 같은 말을 하고 또 했다. 토요일에는 킥보드를 한 시간이나 탔다. 타다 힘들면 버스 정류장에 앉아 쉬었다. 이번에는 따르릉따르릉으로 시작되는 동요를 불렀다. 우물쭈물하다가 큰일납니다. 마지막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같은 구절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자 남편을 미워하는 감정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불쑥불쑥.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왔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멈춰지진 않았다. 오늘 저녁에 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변기 물을 내리지 않아서 궁시렁거렸더니 남편이 잔소리 좀 그만하라며 소리르 질렀다. 나는 정갈하게 늙고 싶었다. 가끔 옛집이 그리웠다. 거긴 화장실이 두 개였으니까. 변기에 락스를 반 통이나 부었다. 킥보드 타는 게 익숙해져서인지 먼 곳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부터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단지에 가보았다. 새 아파트 단지라 그런지 단지 내에 산책길이 많았다. 킥보드를 타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속도를 냈다. 내리막길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나는 킥보드 손잡이에 왜 거북이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그래, 그건 경고문이었다.
윤성희 '어느 밤'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10-28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제이콥의 방> 버지니아 울프, 김정 옮김, 솔출판사


읽기 시작


 
2019-10-25

나의 인생이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삶에 대해서 말한 것이 그날 밤에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갖지 못했어, 그녀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루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 않나? - 칠십여 년의 인생이지. 하지만 내게는 오직 현재의 순간만 있을 뿐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 그녀는 지금 폭스 트롯 춤곡을 들으며 살아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모리스도 있고 로주도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녀가 모르는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에드워드도. 나는 그날 밤, 키티의 약혼이 발표되던 그날 밤, 그가 내 침대 끝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던가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랬다. 과거의 일들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삶이 긴 띠처럼 그녀 뒤에 놓여 있었다. 울고 있는 에드워드, 말하고 있는 레비 부인, 내리는 눈, 속이 갈라진 해바라기, 베이스워터 거리를 따라 달리는 노란 버스. 그때 나는 혼자 생각했지, 이 버스 안에서 내가 제일 젊구나. 그러나 이제 내가 가장 나이 든 사람이야...... 수백만 가지의 이런저런 일들이 그녀에게 떠올랐다. 원자들이 갈라져 춤을 추고 그러다가 저절로 뭉쳤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루는 거지?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작고 딱딱한 동전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한가운데에 '나'라는 것이 있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매듭, 중심. 그리고 그녀는 책상에 앉아 압지 위에 그림을 그리며, 빗살이 뻗어 나오는 작은 구멍들을 뚫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것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사물이 사물을 따라 나왔고 장면이 장면을 지워 갔다. 그러고 나면 사람들이 말하지,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어요!"
p460

현재
<세월> 버지니아 울프, 김영주 옮김,열린책들



 
2019-10-17
하녀가 이미 그녀의 짐들을 풀어놓은 뒤였다. 물건들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엘리너는 드레스를 벗고 흰 속치마 차림으로 꼼꼼하지만 조심스럽게 세수를 했다.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태양에 그을린 그녀의 얼굴은 영국의 햇볕으로 온통 따가웠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이브닝드레스를 입으면서, 자신의 목이 마치 갈색 칠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선과 뚜렷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회색 머리가 섞여 있는 숱 많은 머리를 틀어서 재빨리 고리 모양으로 정돈하고, 가운데에 황금알이 박힌 응결된 산딸기 잼처럼 생긴 붉은 방울 보석을 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55년 동안 너무도 익숙해져서 그녀 자신도 더이상 쳐다보지 않았던 그 여인 - 엘리너 파지터를 쳐다보았다. 늙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마를 가로질러 주름살이 지고 탄탄했던 살은 음푹 꺼지고 주름이 잡혀 있었다.
...
"우리 서로 아는 사이였지요." 윌리엄 경이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예전에 애버콘 테라스에 오곤 했던 윌리엄 화트니 _ 그 옛날의 더빈 _일 수 있을까? 바로 그였다. 그녀는 그가 인도로 간 이후로 그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럴까? 그녀는 그녀가 예전에 알았던 소년의 늙고 주름투성이의 벌겋고 누런 얼굴 - 그는 거의 머리가 없었다 - 에서 눈을 돌려 그녀의 남동생인 모리스를 보면서 자문했다. 그는 머리가 벗어지고 야위었지만, 분명히 그녀 자신처럼 인생의 장년기에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그들도 모두 윌리엄 경처럼 갑자기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네들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때 그녀의 조카인 노스와 질녀인 페기가 그네들의 엄마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
그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독려했어야 했나?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었다. 결국 일은 그렇게 되어버렸고 그걸로 그만인 법이다. 그는 결혼했고 세 아이를 두었고 원하건 원치 않건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세상 일들이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의 실험을 하고, 저들은 또 저들의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조카인 노스와 질녀인 페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얼굴에 햇빛을 받으며 그녀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건강한 달걀 껍질 같은 그들의 얼굴이 유난히 젊어 보였다. 페기가 입고 있는 파란 드레스가 어린아이의 모슬린 원피스처럼 눈에 띄었고 갈색 눈을 한 노스는 아직 크리켓을 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반면 페기는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잘 교육받고 자란 아이들이 웃어른들의 얘기를 들을 때 짓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재미있어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지루해할까? 엘리너는 어느 쪽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
그녀는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부엉이를 보고 싶었다. 그녀는 새에 대해 부쩍 흥미를 느껴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야, 침실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씻고 새를 관찰하는 나이든 여자라,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눈 주위에 주름이 있긴 했지만 자신의 눈이 여전히 빛나는 듯했다. 더빈이 칭찬을 했기에 기차 안에서 그늘 속으로 가렸던 그 눈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씻고 새를 관찰하는 나이 든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었어. 그녀가 생각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난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거울에서 물러났다. 멋진 방이었다. 누군가 벌레를 짓이긴 흔적들이 벽에 남아 있고 창문 아래에서 남자들이 고함치던 외국 여관의 침실들에 머물렀던 뒤라서인지 방은 그늘지고 세련되고 시원했다. 그런데 쌍안경은 어디 있담? 어디 서랍에라도 치워두었나? 그녀는 쌍안경을 찾으려고 돌아섰다.
...
"아주 오래전이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오래전도 아니야." 엘리너가 말했다. 그녀는 조금 화가 났다. "글쎄......"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이십 년 - 이십오 년 즈음일거야."
그녀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페기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고작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일 것이다.
......
아마도 그녀가 줄곧 여행 중이어서 그럴 테지만, 아직도 배가 부드럽게 바다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고, 아직도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프랑스를 지나느라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홑이불로 덮고 몸을 쭉 편채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사물들이 그녀는 지나쳐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람들의 삶, 그들의 변화하는 삶이었다.
...
천장의 나방들을 바라보고, 촉촉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에서 나무로 원을 그리며 나는 부엉이 소리를 듣고 있던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 버린 그 말들은 그 온전한 의미를 내주지는 않았지만 고대 이탈리아어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무엇인가를 접어 넣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책을 덮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조만간 이 책을 읽어야지. 크로스비에게 연금을 주고 그만두게 하고 나면, 그때...... 다른 집을 빌려야 할까? 여행을 할까? 드디어 인도로 갈까? 윌리엄 경이 옆방에서 침대에 들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끝이 나고 그녀의 삶은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야, 나는 또 다른 집을 구할 생각은 없어, 또 다른 집은 아니야. 천장 위에 얼룩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배가 부드럽게 바다를 헤쳐 가고, 기차가 선로를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다시 들었다. 모든 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법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건 지나가고 모든 건 변하지.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어디로?...... 나방들이 천장을 맴돌며 돌진하듯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책이 미끄러져 마루에 떨어졌다. 크래스터가 돼지를 탔지. 그런데 은쟁반은 누가 탔더라?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녀는 돌아누워 촛불을 껐다. 어둠이 가득 내렸다.

1911년
<세월> 버지니아 울프, 김영주 옮김,열린책들



 
2019-10-16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노년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하나씩 하나씩 사람의 기능을 잘라내면서도 살아 있는 어떤 것을 중심에 남겨놓다니. 체스 한 판, 공원에서의 드라이브와 아버스넛 장군의 저녁 방문만을 남겨놓고서....... 그녀는 신문을 오려낸 것들을 쓸어 모았다.
유제니 숙모와 딕비 숙부처럼, 제 기능을 다 갖추고 있는 생의 절정기에 죽는 것이 더 낫지. 하지만 그는 저런 인물은 아니었어. 오려낸 신문 기사에 눈길을 주며 그녀는 생각했다. "뛰어나게 매력적인 인물...... 사냥과 낚시와 골프를 즐겼다.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았어. 그는 아주 기이한 사람이었어. 유약하고 민감하고 직함을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했지. 그리고 아내의 활발함에 종종 기가 눌렸어. 그녀는 짐작했다. 그녀는 신문 조각들을 밀어놓고 그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신기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두 사람에게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말이야. 유제니 숙모를 좋아하는 마틴, 딕비 숙부를 좋아했던 그녀. 그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1908년
<세월> 버지니아 울프, 김영주 옮김,열린책들

1880년부터 1918년까지의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에 태어나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9-10-14
내심 하는 생각들

이럴 일인가, 싶은데 나는 이 소설을 반년 동안 썼다. 중간에 다른 원고를 쓰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이러저러한 일들도 있었고, 두어 번은 완전히 새로 시작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면서 핑계를 대고 싶어도 겨우 단편 한 편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이럴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작년 여름에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아무래도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원고를 밤새 붙들고 있다가 그날 쓴 문장을 모두 지우고 어스름한 새벽빛에 수면안대를 한 뒤 침대에 누울 때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에서 이렇게까지 살 일인가, 로 곡잘 생각이 넘어갔고...... 그러다 약속한 기한을 한참 넘기고 이제는 정말이지 반드시 보내야 하는 최후의 마지막 데드라인이 밝어오기 전날, 며칠째 제대로 잠도 자지 않은 채 원고를 완성시키려고 애쓰던 나는 절망에 빠졌다. 막상 끝을 내려니 반년간 매달려온 이 소설이 완전히 망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체로 나의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내가 쓰는 글이 충분히 소설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이상하지, 나만큼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데 이 소설은 너무 말이 많아, 너무 직접적이면서 또 너무 추상적이고(장면은 거의 없는데다가), 지루한 감정 토로만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잖아?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심지어 전위적이지도 않아...... 나는 자주 내 글의 뱃가죽이 너무 얇아 내장이 훤히 비쳐 보이는 개구리처럼 불필요할 정도로 투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글쓰기를 멈추게 될 때마다 '소설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느낀/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거야.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 아니어서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마감 전날 참담한 기분이 되어 이건 소설도 아냐, 역시 아무래도...... 디테일이 너무 없이, 심지어...... (다시 한번) 전위적이지도 않고, 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놀랍게도 완전히 절망에 빠져 그다지 길지도 않았던 나의 소설가 인생을 끝내기로 마음먹기 직전(다행히 실제로 그런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 느닷없이 어딘가에서 희망의 전조 같은 것이 아주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걸 느꼈으며(그 와중에 나는 마지막 두 문단을 썼고, 문장을 몇 개 손보았다) 종말의 전조만큼이나 분명한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이상 전조가 아니게 되었고 이내 나는 왜인지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이게 바로 '그 소설'이야. 내가 쓰려고 했던 그 '소설!' 그러고 곧이어 나는 한시라도 빨리 내가 쓴 것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거야, 이게 내가 쓰려던 거라구!...... 물론 이 역동적이고 파고 높은 감정은 송고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나는 늘 그렇듯이 송고 후 오랫동안 깊은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작가노트, 정영수 ⌈우리들⌋




 
2019-10-12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상을 삼분의 이쯤 읽다가 내버려 뒀다가
다시 읽고 있다.
하의 초반, 아버지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삼형제의 첫째가 누명을 쓰는 결정적인 장면을 지나며
이제는 예전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흥미진진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흥미진진하지가 않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것을 떠나서 읽기 시작하면
책을 덮지 못해 새벽까지 읽곤 했다.





 
2019-10-12
피터 거리를 뒤덮으며 피어오르던 연기가 집들 사이의 좁은 틈 사이에서 짙어져 촘촘한 회색 베일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길 양쪽의 집들은 선명하게 잘 보였다. 거리 중간에 있는 두 채를 제외하고 집들은 모두 똑같았다. 점판암 지붕을 덮은 누르스름한 회색 상자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린아이 몇이 거리에서 놀고 있었고 고양이 두 마리가 배수로에 있는 무엇인가를 앞발로 뒤집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무엇인가 먹을 것을 찾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거리를 이쪽저쪽으로, 위아래로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맹금의 눈처럼 탐욕스럽고 욕심 사나워 보이면서도 허기를 풀어줄 먹잇감이 전혀 없다는 듯이 부루퉁하고 졸린 듯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그녀는 여전히 게으르고 불만에 찬 눈길로 거리를 위아래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륜마차가 모퉁이를 돌아왔다. 그녀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마차는 길 건너편 집 앞에 멈춰 섰다. 그 집은 창틀이 초록색이고 문에 해바라기가 찍힌 명판이 걸려 있어서 다른 집들과는 구분되었다. 납작한 트위드 모자를 쓴 작은 체구의 남자가 내리더니 그 문을 두드렸다. 거의 만삭인 여자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거리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그 남자는 기다렸다. 말도 고삐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참을성 있게 서 있었다. 하얀 얼굴에 턱이 여러 겹이고 아랫입술이 선반처럼 툭 튀어나오온 또 다른 여자가 창가에 나타났다. 두 여자는 나란히 창문에 몸을 기대고 그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는 안짱다리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그에 대해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곧 담배를 내던졌다. 그들은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다음에 무슨 일을 할까? 말에게 먹을 것을 주려나? 그러나 이때 회색 트위트 치마에 코트를 입은 키 큰 여자가 황급히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러자 그 작은 남자가 몸을 돌려 손을 모자에 대고 인사했다.

<세월> 버지니아 울프, 김영주 옮김,열린책들


묘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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