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9-09-22
그녀는 무엇보다도 레이디 벡스버러처럼 검은 머리, 쭈글쭈글한 가죽 같은 피부에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인이었으면 했다. 레이디 벡스버러처럼 느긋하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몸집이 크고, 남자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시골에 별장을 소유하고, 아주 점잖고 아주 진지한 여성. 반면 그녀 자신은 가느다란 완두콩 줄기 같은 몸집에 우스울 만큼 작은 얼굴에 코는 새의 부리처럼 뾰족했다. 사실 몸을 잘 가꾸고 있었고, 손과 발은 여전히 고왔다. 또, 옷값을 별로 들이지 않는 것치고는 옷도 잘 입었다. 하지만 이제 종종 자신이 걸치고 있는 이 몸(그녀는 네덜란드 그림을 보려고 멈추어 섰다), 이 몸과 그 모든 기능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 더는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과 더불어 본드 스트리트를 걸어가는, 이 놀랍고도 다분히 엄숙한 행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야. 클라리사조차도 더는 아니고 그저 미세스 댈러웨이, 리처드 댈러웨이의 부인으로서.

밀리선트 브루턴의 오찬 파티는 각별히 유쾌하다고 하던데, 그녀는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저열한 시기심도 그녀를 리처드에게서 떼어 놓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녀가 두려운 것은 시간 그 자체였다. 레이디 브루턴의 얼굴이 마치 무감각한 돌에 새겨진 해시계나 되는 듯이, 그녀는 거기서 자기 삶의 시간이 기우는 것을 읽었다. 해마다 그녀의 몫은 베어져 나가 이제 남은 귀퉁이는 얼마 되지 않으며, 더 이상 잡아 늘일 수도 없고 젊었을 때처럼 삶의 다채로운 빛깔과 맛과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젊었을 때는 그 모든 것으로 얼마나 충만했던지, 방 안에 들어설 때면 그녀의 존재로 온 방이 가득 차는 듯했다. 가끔 자기 응접실 문간에 서서 지체할 때문, 마치 물속에 뛰어들기 직전의 잠수부와도 같이 미묘한 긴박감을 맛보곤 했다. 발밑의 바다는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고, 파도는 막 부서질 듯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퍼져 나가면서, 수초를 휘말고 숨기고 뒤집으면서 진주빛 포말이 엉겨붙게 한다.

그녀가 늙었다고 생각할까? 그가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할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쪽에서 눈치 채게 될까? 그가 돌아와 보니 그녀가 늙어 있더라고? 사실 그랬다. 앓고 난 후로 그녀는 머리가 거의 새하얗게 세었다.
브로치를 탁자 위에 놓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경련을 느꼈다. 잠시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를 틈타, 얼음처럼 차디찬 새발톱이 가슴속을 파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직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쉰두 번째 해로 접어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여러 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월, 칠월, 팔워! 한 달 한 달이 여전히 옹글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떨어지는 방울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클라리사는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며) 바로 그 순간의 핵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거기에 고정시켰다 - 이 유월 아침의 순간을, 다른 모든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는 이 아침의 한순간을 고정시키듯, 그녀는 거울과 화장대와 늘어선 병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면서 자신의 전부를 한 점에 모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섬세한 분홍빛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려는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2019-09-01



그간.





 
2019-07-28

베토벤 교향곡의 특징을 '극적'이라 한다면, 슈베르트 교향곡의 특성은 C장조 교향곡에서 드러난 것처럼 '서사적'이다.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은 훗날 로베르트 슈만이 깊이 매료되어 '천상의 길이'라고 했을 만큼 그 발전과 전개의 폭이 엄청난데, 그로 인해 음악적 시간을 전혀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이 교향곡 장르에 도입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화성을 새롭게 형상화하는 기술인데, 슈베르트는 이 무렵이 그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 효율적이고 철저하고 목표 지향적인 형식을 대신해서 구조적인 이탈과 더불어 미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정적이고 재귀적이고 정체하는 형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하힘 힌리히센, 홍은정 옮김, 프란츠


음악은 잘 모른다.
이 책의 설명들은 거의 대부분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로 읽는다.
단조와 장조, 으뜸화음 등의 기본적인 개념조차.
그래서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읽힌다.




 
2019-07-24

'이제 불가사의 하고 스산한 음향이 슈베르트 음악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은 없으며, 심지어 가장 밝은  C장조 작품에까지 스며들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우울함을 자아낸다. '

<Franz Schubert> Hans-Joachim Himrichsen, 홍은정 옮김, Franz



 
2019-07-09

<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하힘 힌리히센, 홍은정 옮김, 프란츠

6/30-7/2 서울에 있으면서
약속 중간에 혼자 유어마인드에 들러
(자주 가지 않지만 가면 늘 그렇게 되듯이)
충동적으로 쉭쉭 책을 골랐다.
네 권, 71,000원
그 중 한 권.





 
2019-05-31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빛은 우주가 탄생한 후 38만 년이 지나서야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빅뱅이 있은 직후, 초기 우주는 너무 뜨거워서 우리가 오늘날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낮아졌고, 물이 얼음이 되듯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38만 년쯤 지났을 때 수소, 헬륨과 같은 원자들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빛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전에는 빛과 물질이 한데 뒤엉킨 어떤 '것'이 있을 뿐 빛은 호롤 존재할 수 없었다. 이때 탄생한 빛은 지금까지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하며, 그 발견에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우주는 38만 살이 되던 해, 자신의 모습을 빛에 남겨 놓은 것이다.

<떨림과 울림> 김상욱, 동아시아



 
2019-05-30


<떨림과 울림> 김상욱,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흐름을 잃었다.
모든 면에서.
최근 몇 주, 몇 달이라기보다는
몇 년.
독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2019-05-30


<아무튼, 식물> 임이랑, 코난북스

아무튼 시리즈는 가볍게 읽는다.

집에 식물에 늘었다.










 
2019-05-07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왔다.
d는 젖은 얼굴을 닦으려고 수건을 잡았다가 놓았다. 놓쳐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요일 오후 아홉시 직전이었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각거렸다. 거품 섞인 물이 세면대에 고여 있었고 d는 맨발로 타일을 밟고 있었다. d가 조금 전에 잡았다가 흠칫 놀라 놓아버린 것. 그건 평범한 수건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집에 있던 물건. d는 매일 아무 때나 그걸로 얼굴이며 목을 닦은 뒤 수건걸이에 도로 걸거나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여러번 빨아 말리길 반복한 탓에 좀 뻣뻣해지고 납작해진 아이보리색 면직물이었다. 무늬도 이니셜도 없어 d로서는 다른 수건과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의 온도가 갑자기 매우 낯설었다. 체온을 가진 것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을 향해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d는 컴컴한 부엌을 가로지르다가 식탁에 놓은 탁상달력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더듬어 그것을 주었을 때 d는 표지까지 열세장인 두꺼운 마분지와 좁은 간격으로 말린 스프링에서 온도를 느꼈다. 달력을 올려두고 식탁을 짚어보니 그것 역시 미지근했다.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가구와 식기, 유리, 각종 손잡이들. d는 그날부터 서서히 그것을 눈치챘다. 공기보다는 싸늘해야 마땅한 사물들이 미묘한 생물처럼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라고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라고.
...

d는 거의 모든 사물에서 온기를 감각하게 된 뒤로 외출하지 않았다.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고 그다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사물들을 부수고 쪼개고 버렸다. 공들여 그 일을 하다보면 사물들의 온기로 손이 뜨거워졌다. d는 작열감을 줄이려고 머리를 긁거나 몸에 손을 문지러가며 작업했다. 쓰레기를 계속 버려 골목을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툴툴거리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도 했으나 d는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상자를 채우고 물건을 버리고 상자를 채웠다. 사물들은 내내 기묘하고도 기괴한 생물들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고 그것을 만질 때마다 d는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니까.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04-27


울고 있는 가수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맹세는 따뜻함처럼 우리를 배반했으나
우는 철새의 애처러움
우우 애처러움을 타는 마음들
우우 마음들이 가여워라
마음을 빠져나온 마음이 마음에게로 가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조차 나를 떠난다
무정하니 세월아,
저 사랑의 찬가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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