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24-04-15

(아래에 이어서)

위대한 것이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들을 가능성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위대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때 아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 공간의 침묵이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압도하는 위력에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우주를 능가하는 무한한 초월의 경험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고 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징은 감성적인 것을 매개로 추감성적인 무한을 지시하는 힘이 있다. 초감성적인 무한은 감성적인 것을 매개로 상징화된다. 유추는 한편에서는 같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것을 묶는 힘이다. 같지 않음은 차이의 근거다. 같음은 일치라는 공속성을 말한ㄷ. 결국 유추는 같지 않음과 같음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을 한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무한과 유한은 대립한다. 숭고는 무한과 관계한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압도하면서 다가오는 무한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내재하고 있다. "자연의 숨은 계획"은 우리의 능력에 말을 걸어 무한을 파악하고 도전하라고 재촉한다. 상징과 유추는 숭고의 불가능성이 직면에서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아주 절망적인 시도이다. 숭고는 일단 유한한 모든 것을 흔들어 깨움으로써 주체를 들어 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주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미와 같은 그런 쾌의 감정이 아니다. 숭고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쾌가 아니라 불편함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우리의 유한한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편함은 우리가 견디고 완성하려고 노력하면 우리에게 잠들어 있는 모든 능력을 활성화하는 즐거움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이학사









 
2024-04-15


7. 숭고미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결론에서 "내 위에는 별빛 총총한 하늘이 있고 내 마음 안에는 도덕법칙"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이 사실에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고백한다. 엄격하기 짝이 없는 칸트가 <에밀>을 읽다가 산책을 놓친 사건은 유명하다. 루소의 도덕 감정은 칸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을 도덕적 숭고미로 논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판단력비판> 59에서 "아름다움은 도덕성의 상징"이라고 규정한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도덕적 숭고미를 독립된 주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실천이성비판<의 존중심 분석에서 도덕적 숭고미를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 안에 내재한 초감성적 이념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미는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강조한다. 하지만 숭고의 경우에는 상상력과 이성 이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적 조화가 쾌로서 경험되는 것과 달리, 숭고는 항상 불쾌로서 경험된다. 숭고에서는 이성 이념을 파악하려는 상상력의 활동이 불가능성에 맞부딪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그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성 이념을 파악하려는 과제를 계속해서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반전을 경험한다. 이것이 숭고의 역설이다.
...
물리적 숭고는 압도하는 힘과 관계한다. 수학적 숭고는 절대적인 크기와 관계한다. 비교가 불가능한 크기와 힘은 일단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모둔 규정은 한계를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교 불가능한 크기와 압도하는 위력에 직면하는 숭고에서는 모든 규정적 활동이 거부된다. 헤겔은 파악 불가능하고 확정할 수 없는 모든 무한을 "껄끄러운 무한"으로 규정한다. 가장 큰 수는 확정할 수 없다. 칸트는 이것을 부정적 척도로 제시한다. 너무 넓거나, 너무 클 때, 그리고 너무 길거나, 너무 압도적일 때 우리는 그러한 비확정적인 대상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도대체 그 끝을 확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것을 규정된 무엇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우리는 그 대상을 파악할 수도 없고 파악할 말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인식은 규정 가능한 개념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숭고에서는 모든 개념이 판단중지된다. ... 미에서는 주체가 주관 밖에서 타자들로부터 보편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숭고에서는 모두가 좌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숭고에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초감성적 이념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의 능력 자체를 끌어올리는 것이 문제이다.  
...
수학에서 역학적 크기로서의 무한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도덕에서 무제약적 가치는 인격의 존엄성으로 드러났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는 자연 인과의 지배를 받지만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차원에서는 자기 인과라는 자유를 통해 규정된다. 우리 인간은 형상의 영역에서는 사물로 취급되지만 동시에 예지계의 구성원으로서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존중된다. 우리 인간은 차원을 달리하는 영역에서 각기 다른 가치들에 의해 규정된다. 한 인간 안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영역에서 각기 다른 가치들에 의해 규정된다. 한 인간 안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두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탁월한 삶을 산다.
이런 우리에게 상징은 이처럼 대립하는 두 차원을 모으는 힘으로 드러난다. 숭고는 파악 불가능한 공허한 피안이 아니다. 숭고는 상징과 유추를 통해 드러난다. 상징과 유추는 무한한 이성 이념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런 파악은 인식적 규정 활동이 아니다. 미적 숭고는 파악 불가능한 무한을 감성을 매개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감각은 언제나 초감성적 이념에 부적합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숭고에서 우리는 미적 이념을 드러내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고에서 우리는 미적 이념을 드러내려는 분별력에 의해 그것에 대가갈 수 있다. 수학적 숭고에 있어서 절대적인 크기는 상상력이 아무리 종합에 종합을 수행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종합하는 행위를 무한히 지속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한 이념에 대한 접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무한에 대해서는 어떤 규정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의 유한한 능력을 끌어올린다.
개념 초월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초감성적인 것을 감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숭고를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이처럼 절망과 좌절의 경험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과 좌절을 의식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것을 파악하고자 무한하게 도전할 때 우리에게는 반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숭고를 파악함에 있어서 우리는 타자에 압도되고 주관 자체도 위축된다. 하지만 이런 위축은 우리 안에서 반전하는 힘을 가속시킨다. 우리는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려는 반전의 힘을 부단히 축적하고 지속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상상력은 비록 확정적인 방식으로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미적 이념을 드러내는 과제를 떠안는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은 비로 그 무능력으로 인해 좌절하지만 이 좌절은 내 안에서 숭고의 대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분발을 불러일으킨다. 숭고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전은 내 안에서 발생하는 반성적 힘으로 전환된다.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이학사






 
2024-04-14


<인간이란 무엇인가> 백종현, 아카넷



 
2024-02-15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이세욱 옮김, 정원



 
2023-09-25

7. 숭고미


물리적 숭고는 압도하는 힘과 관계한다. 수학적 숭고는 절대적인 크기와 관계한다. 비교가 불가능한 크기와 힘은 일단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규정은 한계를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교 불가능한 크기와 압도하는 위력에 직면하는 숭고에서는 모든 규정적 활동이 거부된다. 헤겔은 파악 불가능하고 확정할 수 없는 모든 무한을 "껄끄러운 무한"으로 규정한다. 가정 큰 수는 확정할 수 없다. 칸트는 이것을 부정적 척도로 제시한다. 너무 넓거나, 너무 클 때, 그리고 너무 길거나, 너무 압도적일 때 우리는 그러한 비확정적인 대사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도대체 그 끝을 확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것을 규정된 무엇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우리는 그 대상을 파악할 수도 없고 파악할 말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인식은 규정 가능한 개념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숭고에서는 모든 개념이 판단중지된다. 미가 비개념적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것에 기초환다면 숭고는 초개념적인 문제와의 대결에 기초한다. 미에서는 상상력이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서 개념의 보편 규정을 찾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다. 숭고에서는 개념 초월적인 것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것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개념 초월적인 것을 드러내는 숭고에서는 연역이 애초부터 불필요하다 미에서는 주체가 주관 밖에서 타자들로부터 보편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숭고에서는 모두가 좌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숭고에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초감성적인 이념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의 능력 자체를 끌어올리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이성은 스스로에게 도덕법칙의 근원 제공자이다. 이것이 이성의 자기 입법의 의미이다. 하지만 숭고의 경우에 자연 전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숭고는 자연 전체를 규정하는 인식 활동으로 다룰 수 없다. 그리하여 숭고와 대면한 우리의 일차적인 반응은 우리 인식능력에 대한 절망과 한계로 드러난다. 자연 전체는 무한한 크기로서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에 초월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런 우리에게는 초감성적인 것을 감성적인 것들을 매개로 해서 이 둘을 구별하면서도 통합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숭고에서는 보편적 동의를 구하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숭고에서는 모든 개념의 규정하는 활동은 그 부적합성으로 인해 이성 이념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방향을 돌려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이성의 활동성을 주목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를 절망하게 한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분발하게 한다. 그래서 낭만주의 미학은 아이러니를 진리로 규정한다.

수학에서 역학적 크기로서의 무한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도덕에서 무제약적 가치는 인격의 존엄성으로 드러났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 자연 인과의 지배를 받지만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차원에서는 자기 인과라는 자유를 통해 규정된다. 우리 인간은 현상의 영역에서는 사물로 취급되지만 동시에 예지계의 구성원으로서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존중된다. 우리 인간은 차원을 달리하는 영역에서 각기 다른 가치들에 의해 규정된다. 한 인간 안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두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탁월한 삶을 산다.

이런 우리에게 상징은 이처럼 대립하는 두 차원을 모으는 힘으로 드러난다. 숭고는 파악 불가능한 공허한 피안이 아니다. 숭고는 상징과 유추를 통해 드러난다. 상징과 유추는 무한한 이성 이념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런 파악은 인식적 규정 활동이 아니다. 미적 숭고는 파악 불가능한 무한을 감성을 매개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감각은 언제나 초감성적 이념에 부적합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숭고에서 우리는 미적 이념을 드러내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고에서 우리는 미적 이념을 드러내려는 분발력에 의해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 수학적 숭고에 있어서 절대적인 크기는 상상력이 아무리 종합에 종합을 수행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종합하는 행위를 무한히 지속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한 이념에 대한 접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무한에 대해서는 어떤 규정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함으로서 우리의 유한한 능력을 끌어올린다.

개념 초월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초감성적인 것을 감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숭고를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이처럼 절망과 조절의 경험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과 조절을 의식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것을 파악하고자 무한하게 도전할 때 우리에게는 반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숭고를 파악함에 있어서 우리는 타자에 압도되고 주관 자체도 위축된다. 하지만 이런 위축은 우리 안에서 반전하는 힘을 가속시킨다. 우리는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려는 반전의 힘을 부단히 축적하고 지속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상상력은 비록 확정적인 방식으로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미적 이념을 드러내는 과제를 떠안는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은 비록 그 무능력으로 인해 좌절하지만 이 좌절은 내 안에서 숭고의 대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분발을 불러일으킨다. 숭고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전은 내 안에서 발생하는 반성적 힘으로 전환된다.

위대한 것이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들을 가능성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위대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때 아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 공간의 침묵이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압도하는 위력에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우주를 능가하는 무한한 추월의 경험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고 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징은 감성적인 것을 매개로 초감성적인 무한을 지시하는 힘이 있다. 초감성적인 무한은 감성적인 것을 매개로 상징화된다. 유추는 한편에서는 같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것을 묶는 힘이다. 같지 않음은 차이의 근거다. 같음은 일치라는 공속성을 말한다. 결국 유추는 같지 않음과 같음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을 한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무한과 유한은 대립한다. 숭고는 무한과 관계한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압도하면서 다가오는 무한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내재하고 있다. "자연의 숨은 계획"은 우리 능력에 말을 걸어 무한을 파악하고 도전하라고 재촉한다. 상징과 유추는 숭고의 불가능성에 직면해서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아주 절망적인 시도이다. 숭고는 일단 유한한 모든 것을 흔들어 깨움으러써 주체를 들어 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주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미와 같은 그런 쾌의 감정이 아니다. 숭고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쾌가 아니라 불편함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우리의 유한한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편함은 우리가 그것을 견디고 완성하려고 노력하면 우리에게 잠들어있는 모든 능력을 활성화하는 즐거움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이학사













 
2023-09-24
아래에 이어서,


이성은 모든 것을포괄하는 규정성이고자 한다. 이성은 이러한 체계 요구를 수행할 방도를 스스로 찾고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규정은 제약된 것이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성은 절대로 한정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괄은 개념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성을 앎의 대상으로 확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성은 제약된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 대한 어떤 앎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성은, 헤겔이 잘 지적했듯이, 어떤 규정된 파악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껄끄러운 무한(schlechte Unendlichkeit)"이거나 무 혹은 불가지론의 대상으로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체가 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성이라는 이성의 과제는 규정된 앎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성이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계 요구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성은 바로 이러한 무규정적 전체를 규정하는 과제를 떠안고 완성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바로 이것이 이성의 자기 증명이다.
라이프니츠는 "왜 도대체 어떤 것은 존재하고 무가 아닌가?(Warum ist überhaupt etwas und nicht Nichts?)"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라이프니츠는 '원인'과 '근거'를 구별한다. 여기서 '원인'은 그 현상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근거'는 라이프니츠가 물은 것, 즉 존재를 존재하게 하고 무가 아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수소가 핵융합을 하기 때문에 태양은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처럼 우리는 태양이 어떻게 에너지를 생산하는지 그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대답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이 질문을 통해 일차적으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는데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의 근거는 알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이 놀라움을 우리가 어떻게든 해명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가 말하는 이성도 이런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인과는 오성의 범주의 하나로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왜 그 현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즉 존재하는 것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현대 자연 과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무의미한 것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한계로 남겨둔다.
전체는 앎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전체는 무도 아니다. 전체는 앎이 가능한 한 제한된 것도 아니고 무규정적인 공허한 무도 아니다. 이성은 이 무규정적인 전체를 규정된 것으로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무규정적인 전체를 규정된 것으로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성은 자기 역량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규정적 전체는 규정된 전체로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답이 나온다. 이성은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부단히 뛰어넘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성이 무규정적인 전체를 규정된 전체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성이 한계를 부단히 초월해야 한다는 것은 이성이 규정된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15. 순수이성의 과제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이학사



 
2023-09-24



학문은 항상 제한된 영역에서 그 대상에 적합한 고유의 방법을 지니고 있다. 역사는 사실을 다루고, 수학은 수를 다루고, 화학은 변화를 다루고, 물리는 운동을 다룬다. 범주는 구체적인 이 영역 저영역을 다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어지는 현상 일반에 대한 규정을 다룬다. 이성은 현상 일반만이 아니라 총체성을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이성은 범주처럼 규정 일반도 아니고 학문처럼 그 대상에 적합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성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총체성에 적합한 그런 규정 자체를 스스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성 덕분에(dank der Vernunfit) 총체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총체성에 대한 추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한계로 남아 있다. 이성은 총체성에 대한 추구를 규정된 것으로 완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요구 자체를 포기할 수도 없다.
이성의 이념들은 무제약자에 대한 추구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제약자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한계이다. 따라서 이성은 인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제약자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영혼은 사고하는 주체의 절대적인 통일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모든 현상 일반을 총괄한다. 이것들은 오성처럼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어지는 그런 제약된 영역들이 아니다. 또한 이성은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최상의 조건들로서 신을 파악하고자 한다.
칸트는 무제약자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 규정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칸트가 무제약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체계 전체에 대한 건축으로 자신의 과제를 설명한다. 오성은 범주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어지는 현상 영역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무제약적인 것을 규정된 전체로 아우르고자 한다. 이것은 범주가 하는 제약된 것들에 대한 규정의 실현 - 시공간을 통해 주어지는 무규정적 잡다를 통일하는 것 -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이성은 무규정적인 전체를 규정해야만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전체에 대한 규정은 오성의 규정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체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성이 이루고자 하는 전체에 대한 규정은 그 자체로 무규정적인 것이기에 이것은 자체 모순이 된다. 규정된 전체는 자체 모순이다. 무규정적 젖체는 불가지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무규정적인 전체를 규정된 전체로 완성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이성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걸머지고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성은 대답할 수 없지만 대답해야만 역설과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이러한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은 제약된 것에서 제약된 것들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된 것을 포함하면서 무제약적인 것들에까지 자신의 사고 능력을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성이 이루고자 하는 전체의 포괄은 결코 규정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은 초월이 불가피하지만 초월 자체를 규정하는 과업을 결코 마감할 수는 없다. 규정된 전체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이성은 어떠어떠한 특정한 규정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성은 모든 규정을 포괄하는 규정성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성이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그러한 규정성은 절대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은 자신의 과제를 무규정적 총체성으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이성은 모둔 규정을 포괄하는 규정성을 객관적이고 타당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러한 주장을 규제적으로 사용한다. 이성은 한계를 설정하고 한계를 부단히 초월하는 그런 긴장에 의해 움직인다. 이성은 자신의 탐구에 임하여 다른 것들에 의존할 수 없다. 이성은 오로지 자신의 활동성을 통해 체계 이념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 오성과 이성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이학사




이런 밑도 끝도 없고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데다
결론도 없어보이는 말들이
왜 이렇게 좋은지.




 
2023-09-02
사변이성의 고유한 대상은 오성과 그것의 합목적적 사용에 있으며, 오성이 주어진 잡다에 통일성을 부여하듯이 사변이성 자신은 이념을 통해 개념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 사변이성은 탁월하고 필수불가결한 규제적 기능을 갖는다. 이 기능은 곧 오성을 확실한 목표로 향하게 하고, 그 목표의 조망 하에 그것의 모든 규칙들의 방향선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비록 하나의 이념(허초점) 즉 가능한 경험의 한계 바깥에 있기에 오성의 개념들이 실제 그곳에서 나오지는 않는 점이로되, 그것들의 최대의 통일성과 폭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제 마치 거울에 비친 대상이 거울 저편에[헛초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마치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곳에 존재하는 물 자체로부터 방향선들이 곧장 우리에게 발사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하지만 (...) 만일 우리 눈앞에 주어진 대상들을 넘어 그 먼 저편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오성이 각각의 주어진 경험을 넘어가 자신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이룩하고자 한다면, 이런 착각조차도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여기서 사변이성의 작업 즉 형이상학의 한계와 의의가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결국 칸트가 생각한 오성과 사변이성의 관계는 오늘날의 제반 과학들과 형이상학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변이성이 탐사하는 선험적 가상들, 특히 영혼불멸, 자유, 신의 존재는 이런 이론적 의의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맥락에서 이 선험적 가상들은 독단이다. 물론 반대의 주장들 예컨대 무신론 또한 독단이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이론적 맥락에서 공히 독단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천적 맥락에서 사변이성의 규제적 기능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무신론이 아니라 유신론을 요청해야(postulieren)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지 이론적 방식으로 증명할 길은 없다. 하지만 도덕법칙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영혼불멸)을 긍정하도록 요청한다. 다시 말해 물 자체의 자리에 자유를, 그리고 영혼불멸, 신을 놓음으로써, 이 이념들을 통해서 "오성이 각각의 주어진 경험을 넘어가 자신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이룩'하는 이론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행위 있어서도 그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변이성, 이념들, 선험적 가상들의 규제적 역할은 이렇게 이론적 맥락 - 과학적 성과들을 그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극한으로 투사해가는 것 - 만이 아니라 실천적 맥락 - 자유, 영혼불멸, 신이라는 이념들에 입각해 인간다운 가치와 행위를 실현해가는 것 - 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사변이성의 모든 이념들 중에서 (...) 그 존재 가능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인데, 왜나하니 바로 그것이 도덕법칙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신'과 '영혼불멸'은 도덕법칙의 조건들은 아니며, 이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 의지와 필연적인 대상[최고선]의 조건, 다시 말해 사변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의 조건들이다. (...)이 두 이념에 관해 우리는 그 현실성은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서조차도 인식할(erkennen) 수 있다거나 파악할(einschen)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규정된 의지를 그에 아프리오리하게 주어지 대상[최고선]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가능성은, 비록 이론적으로는 인식하고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이 실천적 조건에 있어서는 적용될(angenommen)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칸트는 도덕법칙의 존재로부터 자유 - '의지의 자유' - 의 이념, 곧 계몽시대에 형성된 최고 가치들 중 하나인 '자율성'의 이념을 요청한다.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도덕법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에게 도덕법칙을 명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칸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며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Du kannst, denn du sllst)"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자유로운 의지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두 조건은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의 요청' 나아가 '실천이성의 우위'(실천이성비판)이다.

-세계철학사3, 이정우, 도서출판 길





 
2023-08-22



5.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한 서문에서 나는 일찍이 예술은 - 도덕은 말고 - 본격 형이상학적 인간 활동이라 했다. 세계의 현존재는 다만 미학적 현상으로만 정당화되었다는 도발적 문장이 본문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실제로 책 전체는 모든 사건 배우에 놓인 오직 하나의 예술적 실체를,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 오직 하나의 <신>을, 전혀 위험할 것 없고 도덕적인 것도 아닌 예술가-신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신으로 말하자면 세울 때나 부술 때나, 선한 일에서나 악한 일에서나 동일한 쾌락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신이며, 세계 창조를 통해, 풍요와 과잉을 추구하려는 신이며, 세계 창조를 통해, 풍요와 과잉에서 비롯한 고통으로부터, 제 안에 소용돌이치는 모순에 기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신이다. 세계는 순간순간 신의 자기 구원이 실현된 상태이며, 오로지 환영 속에서만 자신을 구원하는 신의, 가장 고통받는, 가장 모순적인, 가장 대립적인 신의 영원히 변화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환영이다. 이런 예술가 형이상학을 다만 자의적이며, 한가하며, 허무맹랑하다 부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삶을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삶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던 일에 대항하여 언젠가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게 될 정신이 예술가 형이상학을 통해 벌써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아마도 최초로 <선악의 피안>에 놓인 염세주의가 고지되었으며, 이 책에는 쇼펜하우어가 지칠줄 모르고 성난 저주와 벼락으로 앞서 공격했던 <정신의 착락>이 - 감히 도덕을 현상계에 위치시켜(관념론적 전문 용어로서의) <현상>으로 뿐만이 아니라 가상, 망상, 오류, 해석, 조작, 창작 등의 의미에서 <기만>으로 격하하는 철학이 고지되었다.이러한 반도덕적 경향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는 아마도, 기독교와 관련하여 조심스러우면서도 적대적인 침묵을 유지하며 이 책 전체를 통해 기독교를 인류가 이제까지 귀 기울였던 도덕적 역설 가운데 가장 타락한 형태로 다루고 있음을 통해 매우 잘 알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이 책에서 가르친 순수 미학적 세계 해석과 세계 증명에 대한 가장 큰 적은 기독교적 교설인바, 기독교는 다만 도덕적이며 도덕적이고자 하며, 자신의 절대적 척도에 따라, 예를 들어 신의 진실성에 따라 모든 예쑬을 거짓의 왕국으로 추방한즉, 이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단죄하고 있다. 예쑬 적대적이라 할 이런 유의 사고방식과 평가 방식의 배후에서 - 그것이 나름대로 진지한 것인 한 - 나는 삼에 적대적인 태도, 삶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혐오를 감지했다. 이는 삶을 결국 가상, 창작, 착각, 시점, 관점과 오류의 필연성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리라. 기독교는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철저히 삼에 대한 삶의 혐오와 염증인바,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 혹 지금보다 나은 삶에 대한 믿음 속에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치장되었을 뿐이다. 세계에 대한 증오, 격정에 대한 저구,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차안을 보다 잘 비난하기 위해 고안된 피안, 근본적으로 보자면 허무, 종말, 안식, <안식일 중의 안식일>을 향한 욕구 - 이 모든 것은 내 보기에 도덕적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기독교의 절대적 의지, 다시 말해 <몰락에의 의지>라고 할 온갖 형식들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가장 섬뜩한 형식과 닮았으며, 적어도 삶에 깃든 중병, 피로, 낙담, 쇠진의 징표와 흡사하다. 삶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도덕(특히 기독교적, 즉 절대적 도덕) 앞에서 삶은 늘 불가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삶은 경멸과 계속되는 부정의 무게에 눌려 마침내 욕구할 가체가 없는 것으로, 그 자체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도덕은 어떤가? 도덕은 시종일관 <삶을 부정하는 의지>, 파괴의 은밀한 본능, 몰락과 축소와 비방의 원리가 아니까? 따라서 위험 중의 위험이 아닌가? 그리하여 도덕에 맞서 당시 나의 본능은, 삶을 변호하려는 나의 본능은 이 문제 많은 책을 들고 일어서, 삶에 대한 전혀 다른 반대 이론과 반대 평가를 내린바, 그것은 순수 예술적인 것이었으며 반기독교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름 붙일 것인가? 고전 문헌학자, 언어 연구자로서 나는 그것에 얼마간 자유롭게 - 누가 도대체 반기독교도의 올바른 이름을 알겠는가 - 희랍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디오뉘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자기비판을 시도함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eich Nietzsche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23-08-17


책을 샀다.
<초인적 힘의 비밀> 앨리슨 벡델, 그래픽에서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유미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마르셀 프루스트.
알라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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