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23-09-02

사변이성의 고유한 대상은 오성과 그것의 합목적적 사용에 있으며, 오성이 주어진 잡다에 통일성을 부여하듯이 사변이성 자신은 이념을 통해 개념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 사변이성은 탁월하고 필수불가결한 규제적 기능을 갖는다. 이 기능은 곧 오성을 확실한 목표로 향하게 하고, 그 목표의 조망 하에 그것의 모든 규칙들의 방향선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비록 하나의 이념(허초점) 즉 가능한 경험의 한계 바깥에 있기에 오성의 개념들이 실제 그곳에서 나오지는 않는 점이로되, 그것들의 최대의 통일성과 폭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제 마치 거울에 비친 대상이 거울 저편에[헛초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마치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곳에 존재하는 물 자체로부터 방향선들이 곧장 우리에게 발사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하지만 (...) 만일 우리 눈앞에 주어진 대상들을 넘어 그 먼 저편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오성이 각각의 주어진 경험을 넘어가 자신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이룩하고자 한다면, 이런 착각조차도 꼭 피요하다고 하겠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여기서 사변이성의 작업 즉 형이상학의 한계와 의의가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결국 칸트가 생각한 오성과 사변이성의 관계는 오늘날의 제반 과학들과 형이상학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변이성이 탐사하는 선험적 가상들, 특히 영혼불멸, 자유, 신의 존재는 이런 이론적 의의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맥락에서 이 선험적 가상들은 독단이다. 물론 반대의 주장들 예컨대 무신론 또한 독단이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이론적 맥락에서 공히 독단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천적 맥락에서 사변이성의 규제적 기능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무신론이 아니라 유신론을 요청해야(postulieren)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지 이론적 방식으로 증명할 길은 없다. 하지만 도덕법칙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영혼불멸)을 긍정하도록 요청한다. 다시 말해 물 자체의 자리에 자유를, 그리고 영혼불멸, 신을 놓음으로써, 이 이념들을 통해서 "오성이 각각의 주어진 경험을 넘어가 자신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이룩'하는 이론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행위 있어서도 그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변이성, 이념들, 선험적 가상들의 규제적 역할은 이렇게 이론적 맥락 - 과학적 성과들을 그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극한으로 투사해가는 것 - 만이 아니라 실천적 맥락 - 자유, 영혼불멸, 신이라는 이념들에 입각해 인간다운 가치와 행위를 실현해가는 것 - 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사변이성의 모든 이념들 중에서 (...) 그 존재 가능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인데, 왜나하니 바로 그것이 도덕법칙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신'과 '영혼불멸'은 도덕법칙의 조건들은 아니며, 이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 의지와 필연적인 대상[최고선]의 조건, 다시 말해 사변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의 조건들이다. (...)이 두 이념에 관해 우리는 그 현실성은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서조차도 인식할(erkennen) 수 있다거나 파악할(einschen)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규정된 의지를 그에 아프리오리하게 주어지 대상[최고선]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가능성은, 비록 이론적으로는 인식하고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이 실천적 조건에 있어서는 적용될(angenommen)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칸트는 도덕법칙의 존재로부터 자유 - '의지의 자유' - 의 이념, 곧 계몽시대에 형성된 최고 가치들 중 하나인 '자율성'의 이념을 요청한다.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도덕법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에게 도덕법칙을 명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칸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며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Du kannst, denn du sllst)"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롭다. 왜냐마현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자유로운 의지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두 조건은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의 요청' 나아가 '실천이성의 우위'(실천이성비판)이다.

-세계철학사3, 이정우, 도서출판 길





 
2023-08-22



5.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한 서문에서 나는 일찍이 예술은 - 도덕은 말고 - 본격 형이상학적 인간 활동이라 했다. 세계의 현존재는 다만 미학적 현상으로만 정당화되었다는 도발적 문장이 본문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실제로 책 전체는 모든 사건 배우에 놓인 오직 하나의 예술적 실체를,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 오직 하나의 <신>을, 전혀 위험할 것 없고 도덕적인 것도 아닌 예술가-신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신으로 말하자면 세울 때나 부술 때나, 선한 일에서나 악한 일에서나 동일한 쾌락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신이며, 세계 창조를 통해, 풍요와 과잉을 추구하려는 신이며, 세계 창조를 통해, 풍요와 과잉에서 비롯한 고통으로부터, 제 안에 소용돌이치는 모순에 기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신이다. 세계는 순간순간 신의 자기 구원이 실현된 상태이며, 오로지 환영 속에서만 자신을 구원하는 신의, 가장 고통받는, 가장 모순적인, 가장 대립적인 신의 영원히 변화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환영이다. 이런 예술가 형이상학을 다만 자의적이며, 한가하며, 허무맹랑하다 부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삶을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삶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던 일에 대항하여 언젠가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게 될 정신이 예술가 형이상학을 통해 벌써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아마도 최초로 <선악의 피안>에 놓인 염세주의가 고지되었으며, 이 책에는 쇼펜하우어가 지칠줄 모르고 성난 저주와 벼락으로 앞서 공격했던 <정신의 착락>이 - 감히 도덕을 현상계에 위치시켜(관념론적 전문 용어로서의) <현상>으로 뿐만이 아니라 가상, 망상, 오류, 해석, 조작, 창작 등의 의미에서 <기만>으로 격하하는 철학이 고지되었다.이러한 반도덕적 경향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는 아마도, 기독교와 관련하여 조심스러우면서도 적대적인 침묵을 유지하며 이 책 전체를 통해 기독교를 인류가 이제까지 귀 기울였던 도덕적 역설 가운데 가장 타락한 형태로 다루고 있음을 통해 매우 잘 알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이 책에서 가르친 순수 미학적 세계 해석과 세계 증명에 대한 가장 큰 적은 기독교적 교설인바, 기독교는 다만 도덕적이며 도덕적이고자 하며, 자신의 절대적 척도에 따라, 예를 들어 신의 진실성에 따라 모든 예쑬을 거짓의 왕국으로 추방한즉, 이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단죄하고 있다. 예쑬 적대적이라 할 이런 유의 사고방식과 평가 방식의 배후에서 - 그것이 나름대로 진지한 것인 한 - 나는 삼에 적대적인 태도, 삶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혐오를 감지했다. 이는 삶을 결국 가상, 창작, 착각, 시점, 관점과 오류의 필연성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리라. 기독교는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철저히 삼에 대한 삶의 혐오와 염증인바,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 혹 지금보다 나은 삶에 대한 믿음 속에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치장되었을 뿐이다. 세계에 대한 증오, 격정에 대한 저구,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차안을 보다 잘 비난하기 위해 고안된 피안, 근본적으로 보자면 허무, 종말, 안식, <안식일 중의 안식일>을 향한 욕구 - 이 모든 것은 내 보기에 도덕적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기독교의 절대적 의지, 다시 말해 <몰락에의 의지>라고 할 온갖 형식들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가장 섬뜩한 형식과 닮았으며, 적어도 삶에 깃든 중병, 피로, 낙담, 쇠진의 징표와 흡사하다. 삶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도덕(특히 기독교적, 즉 절대적 도덕) 앞에서 삶은 늘 불가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삶은 경멸과 계속되는 부정의 무게에 눌려 마침내 욕구할 가체가 없는 것으로, 그 자체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도덕은 어떤가? 도덕은 시종일관 <삶을 부정하는 의지>, 파괴의 은밀한 본능, 몰락과 축소와 비방의 원리가 아니까? 따라서 위험 중의 위험이 아닌가? 그리하여 도덕에 맞서 당시 나의 본능은, 삶을 변호하려는 나의 본능은 이 문제 많은 책을 들고 일어서, 삶에 대한 전혀 다른 반대 이론과 반대 평가를 내린바, 그것은 순수 예술적인 것이었으며 반기독교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름 붙일 것인가? 고전 문헌학자, 언어 연구자로서 나는 그것에 얼마간 자유롭게 - 누가 도대체 반기독교도의 올바른 이름을 알겠는가 - 희랍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디오뉘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자기비판을 시도함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eich Nietzsche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23-08-17


책을 샀다.
<초인적 힘의 비밀> 앨리슨 벡델, 그래픽에서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유미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마르셀 프루스트.
알라딘에서.





 
2023-06-26

스피노자의 사유는 존재에 대한, 생명/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이며, 여기에는 각 존재의 자율성 - 임의대로/우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에 따라서 행위할 수 있는 힘 - 도 포함된다. 그리고 같은 본성을 가진 개체들이 힘을 합할 때 그들의 고나투스와 행복 또한 그만큼 커진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인간만큼 유익한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해가는 데에는 "그들의 몸과 마음이 말하자면 하나의 몸과 마음과도 같이 모든 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 그들이 함께 자신들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함께 모두의 공통된 유익함을 지향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이성에 인도되는 사람, 즉 이성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유익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타인들을 위해 욕망하고, 타인들에게 정의롭고 신망 있으며 고결한.정직한 존재가 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각자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기는 커녕 도덕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 공동체 -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자유인들의 공동체, 현자들의 공동체 - 가 바로 스피노자적 뉘앙스에서 유토피아일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복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면서, "하지만 고귀한 모든 것들은 어렵고 또 드물다"라는 말로 <에티카>를 끝내고 있다.

스피노자의 세계는 존재가 곧 생성인 역동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현대 생성존재론의 선구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초월적이고 목적론적인 중세적 세계와 거대한 단절을 이루는 세계이며,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데카르트의 세계와도 대조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신적 표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유한양태로서의 인간은 우연적 힘들의 장 속에서 표류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삶의 극복을 위해 어떤 초월적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인간의 정신도 데카르트에게서와 같은 초월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신체를 떠난 존재가 아니듯이 인간의 신체 또한 정신을 떠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은 이성적 사유와 능동적 감정을 푯대로 삼아 신에 대한 사랑과 지복의 경지에 다가갈 수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의 생애와 더불어 그리고 이 양자의 연계성에 있어, 우리에게 경탄의 염과 더불어 다가온다. 그는 삶에서 겪은 모든 극악한 경험들을 초연하게 소화해내고, 스스로 택한 가장 낮은 곳에서 충만한 영혼으로서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대의 가장 찬연한 철학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다소 단적으로 말해, 스피노자 이후의 철학이란 결국 <에티카>를 새롭게 써 나가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헤겔의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당신은 스피노자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철학자가 아니다."


<세계철학사3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 이정우, 도서출판 길





 
2023-06-19

철학책 작업을 하면서 하는 생각.
이 작업은 제안이 들어왔을 때 좋았고 작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어떻게 해야할 지 길을 못 찾아서 오래 헤맸고 괜한 시작을 했다는 후회를 많이 했다. 못할 일을 시작했다고.
지금은 재미있고 처음 어느 정도 분량의 원고를 스케치 상태로 출판사에 보냈을 때는, 밤에 보냈는데 보내느라 그동한 작업한 것을 다시 보고 다시 보면서 생각하고 조금씩 수정하여 보낸 후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정말 두근거리며 이 작업 너무 재밌다! 너무 재밌다! 속으로 몇 번이나 말했다.
지금은 다시 풀숲을 헤매듯이 헤매며 요소들을 찾고 쌓아가고 있지만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졌을 때 느꼈던 그 기쁨을 알고 있어서 작업이 힘들지는 않다.
재미있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다.
이 철학이라는 분야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면들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화라는 형식을 그리므로, 더 대중적인 취향, 장르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약점이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후로. 하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이것이 나의 취향이고 기호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약점도 아닐 것이다. 이런 책들에 대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발터 벤야민도 마찬가지이다.
학술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았지만 산문들을 좋아한다. 더 알아보고 더 좋아할 것이다.




 
2023-06-17


들뢰즈 작업 때문에 도서관 철학 칸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빌렸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윤미애, 문학동네 스투디움 총서09


너무나 좋아했던 <일방통행로>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요즘 책은 철학책만 읽고 있고 사실 예전처럼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작업과 책읽기에 보내지를 못해서 얼마나 읽고 반납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아했던, 정말 좋아했던 책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한동안은 감정적으로 너무 좋은 것들을 분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설명하는 책들을 읽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책을 읽던 느낌, 기분 그것만 가지고 있고 싶었다. 휘발되기 쉬워 보이는 그대로. 이 책을 잠깐 빵집에서 서문만 읽으면서 그리고 집에 와서 초반 조금 읽으면서 좋았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것들을 제대로 좋아하자, 더 알아보고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이 표현한 것들을 보면서 좋아하자 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잠을 자려고 누워서 좋아했던 것들을 잘 생각하자 다시 생각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자.





 
2023-06-11


사랑에 빠진 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우정은 관조와 대화를 양분삼아 자라날 수 있는 반면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서 나타난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해야 할, 다시 말해 해석햐아 할 한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함축되어 있고 감싸여져 있으며 마치 수형자처럼 갇혀 있다.

역주) 가능세계(혹은 타자)
들뢰즈는 타자의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사물과 내가 사유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변두리의 세계, 즉 ...... 배경을 조직하는 것>(의미의 논리,1969)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사물 세계에 한정지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대상의 어떤 부분을 내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나는 이 부분이 나에게는 안 보이지만, 동시에 타자에게는 보이는 부분으로 여긴다. 그 결과 내가 대상의 이 숨겨진 부분에 도달하려고 할 때, 나는 대상 뒤에 있는 타자와 결합하고, 그리하여 이미 예측했던 전체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사물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투사성 때문에 우리는 늘 사물의 일부분만을 지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지각되지 않는 부분까지 종합하여 대상을 체험한다. 들뢰즈는 어떻게 이런 체험이 가능한가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가능한 까닭은 <돌연히 타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제든 중심에 올 수 있기는 하지만 내 주의력의 변두리에 위치하는 대상들의 세계에 희미한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변두리에 있는 그런 존재가 현존한다는 앎과 느낌은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내 뒤에 보이지 않는 대상들이 세계를 형성하리라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은 타자에게 보일 것이고, 타자에 의해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타자가 없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는 절대적으로 모르는 세계이다. 내가 있지 않은 모든 곳은 현실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암흑이 군림한다..... 세계는 잠재태가 없는 암흑으로 덮이고, 가능성의 범주는 파괴된다.>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각하고 있을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만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바와 같은 하나의 전체화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자를 통해서, 이 전체화된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우리 의식은 구성된다. 그런데 이런 타자의 역할은 대상 인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는 정서적인 측면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지각 활동 속에서 역할한다. 들뢰즈는 <타자의 얼굴<을 언급하면서 이 점을 설명한다. <무서음에 질린 얼굴을 생각해 보자(단 내가 그 무서움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이 얼굴은 하나의 가능 세계, 즉 무서운 세계를 표현한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 지금 내가 현실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부분까지 통틀어 전체로서 하나의 무선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엔 잠재적으로 타자의 시선이 가 닿아 있으리라 여기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잠재적으로 타자의 귀가 들으리라고 여긴다. 이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타자를 <가능 세계의 표현> 혹은 <지각장의 구조>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타자는 내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가능 세계 혹은 잠재적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런저런 개별자인 <구체적인 타자>라기 보다는, 하나의 완전하게 통일되고 조직화된 지각장을 가능케 해주는 <선험적 타자>이다. 타자의 <눈은 가능한 빛의 표현이며 귀는 가능한 소리의 표현이다>, <가능 세계는 오로지 표현된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역으로 타자에게 눈과 귀가 없다면 우리는 빛과 소리가 있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타자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만을 우리가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지각 못하는 부분에는 타자의 지각이 닿아 있고 그러므로 해서 <타자는 세계에 있어서 그 여백을 보증해준다>. 이는 결국 타자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세계를 체험하는 우리 의식의 근본 구조를 가능케 함을 의미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
질 들뢰즈, 서동욱 이충민 옮김, 민음사





 
2023-04-20

그리고 베르그손

'따라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철학에 비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곳에는 차이 개념에 대한 아주 심오한 연구가 있다. 아울러 우리는 비결정 또한 더 이상 애매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결정, 예측불가능성, 우연, 자유는 언제나 원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실제로 베르그손이 수많은 우연으로 짜여진 생의 약동을 경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베르그손은 사물은 사물 자신의 원인들에 앞서서 온다는 것을, 그리고 원인들은 이처럼 사물 이후에 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사물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결정이라는 것이 사물이나 행위가 다른 무엇일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위는 다른 무엇일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 없는 공허한 질문이다. 베르그손이 원하는 것은 왜 사물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인지를 이해시키는 일이며, 이때 사물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그 사물의 원인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의 차이인 것이다. 베르그손은 말한다. "행위 자체의 그 어떤 뉘앙스나 질 속에서 자유를 찾아야 하지, 그 행위가 아닌 다른 것과 그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거나 또는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과 그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아서는 안된다" ... 베르그손주의는 차이가 그 자체로서 있다는 것, 차이는 새로움으로서 실현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14.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

질 들뢰즈,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04-18

이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즉 철학도 다른 모든 분야만큼이나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분과이고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거나 고안해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개념들은 한 철학자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기다리면서 하늘에서 다 만들어진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ㄱ념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물론 이처럼 개념들이 스스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봐, 나는 이런 개념들을 고안해 낼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화가가 어느 날 "봐, 난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될거야"라고, 혹은 한 영화 감독이 "봐,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철학에서도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창조자는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창조자는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 뿐입니다. 아무튼 이 필요 - 이 필요가 있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한 것입니다 - 때문에 철학자 - 저는 최소한 철학자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 는 개념을 창조하거나 고안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철학이 [어떤 것에 대한] 성찰에 몰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

철학에 빠져든다, 빠져든다...



 
2023-04-16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물들 사이로 빠져들어가는 일, 우리가 그곳에서 다른 것과 결합하는 일은 [입자들의] 빠름과 느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결코 새로이 시작하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백지 상태를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환경 사이로 빠져들어가고, 환경 속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리듬을 받아들이거나 리듬을 부여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변용들을 미리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길고 긴 작업이며, 내재성의 평면 또는 고름의 평면의 건설을 함축하는 길고 긴 스피노자적 신중함과 지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윤리학⌋은 도덕을 하나의 비교행동학으로서 받아들인다. 즉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입자들의]빠름과 느림이 이루는 구성으로서,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이 이루는 구성으로서 도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은 진정한 외침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신들은 그 일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떠나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또는 영혼이 이런저런 만남, 배치, 구성 속에서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신체에 대하여 지도제작을 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제작된 지도의 경도와 위도를 합친 전체는 언제나 가변적인, 그리고 개체와 집단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건설되며 재건설되는 자연이라는 평면, 즉 내재성의 평면 또는 고름consistance의 평면을 구성한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박정태 옮김, 이학사
5.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 씨의 매력을 알아가기.

그런데 철학은 늘 번역의 문제가 있고
고름의 평면은 consistance-견고함, 고밀도, 견실함, 안정성, 일관성 등의 의미를 '고르다'(울퉁불퉁하지 않다)의 명사형으로 '고름'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나는 자꾸만 몸에서 나오는 고름이 생각이 나서 단어를 보았을 때 원래 의미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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