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6-07-10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푸른 물빛에서 속 빈 파도의 녹색에 이르기까지 엷어졌다가 진해졌다가 하는 빛깔을 싣고 말머리의 깃털이나 숙녀용 모자의 깃탈과도 같이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느릅나무들의 흥분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치지 않으리라. 눈을 감고, 더는 보지 않으리라.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2016-07-03


웃는 늑대, 문학동네
쓰시마 유코 연보 중,
1956년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인명사전을 통해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2016-07-03


웃는 늑대, 다 읽었다.



 
2016-06-28
"...... 그래도 '레미'는 진짜 아버지에 대해 알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카피'가 미간을 좁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놀란 '레비'가 '카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카피'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렇잖아. 네 살 때까지는 늘 아버지랑 단둘이었고,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잖아. 하지만 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가끔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어머니라는 생각이 안 드는걸. 어머니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고 넓은 건 아니야.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들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어머니는 오빠한테 모든 걸 쏟아버린 느낌이었어...... 물론 오빠보다 몸이 크고 튼튼한데다 말대답을 하고 비밀까지 만드니까 나를 오빠랑 똑같이 예뻐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난 시시한 보통 아이에다 남자아이도 아니니까. 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해서 얼른 자립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어. 아마 어머니는 오빠랑 둘이서 살 생각이었을거야. 그런데 오빠가 죽었으니 불쌍하지. 사는 보람이 없어져버렸으니까. 내가 오빠 대신이 될 수도 없고 말이야.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도 안심하고 오빠 동생이 나하고 좀더 잘 지낼 수 있었겠지만......학교 선생님 일도 실은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시시해도 우리 어머니야. 진짜 부모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젠 졸업했어...... 내 말은 진짜 어머니라는 게 그렇게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거야. '레미'가 나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카피'가 이야기를 마친 뒤 겨우 얼굴을 들어 '레미'를 바라보았다.
"쳇, 배부른 소리 하네. 자기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정말이지 찜찜한 일이야. 모모타로도 아니고, 나도 분명히 사람 어머니한테 태어났을 테니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늘 마음에 걸리지. 나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녀석들과 어디가 다를까, 비뚤어지게 생각한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걸. 그래서 어딘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 어머니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담임 선생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뭐든 의논하라고 하는걸."
'카피'가 화가 난 듯 주장하자 '레미'도 그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래도 너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잖아. 제대로 된 묘도 있고. 나랑은 천지차이라고."
"그렇지만 '레미'는 적어도 아버지 냄새를 알고 있어. 몸이 따뜻했던 것도, 똥이 따끈했던 것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래서 이제 와서 외롭다거나 괴롭다는 말이 아니야. 나는 그런 슬픈 기분 너무 싫어. 그렇지만 '레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부러운 생각이 든단 말이야. 내가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는 걸 새삼 떠올리게 돼. '레미'의 아버지는 '레미'를 버리고 도망치지도 않았어, 그렇잖아?"

<웃는 늑대> 쓰시마 유코, 김훈아 옮김, 문학동네

어머니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남자아이와
아버지가 갓난아기 때 자살한 여자아이.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묘지에서 4살까지 살았다.
지금으로 치면 노숙이라고 해야하나.
그 묘지에서 여자아이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과 그 애인의 남편이 동반자살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진 화가여서
나중에 남자아이는 그 사건을 신문에서 찾아보고 내막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집-화가의 남은 가족의 집을 찾아간다.
배경은 전쟁 직후 일본.
어쩔 수 없이
작가 개인의 삶과 겹쳐 보인다, 이 작가의 소설은.
하지만 전혀 방해받는 느낌은 아니고
풍성해지는 느낌.




 
2016-06-19
아이는 구립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원하던 신문기사도 찾았다. 아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기사였다. 제일 먼저 죽은 남자가 당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화가였기 때문인 듯했다. 아이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지만, 커다란 사진이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아이가 혼자서 거닐었던 커다란 묘지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움에 몸이 달아올랐다. 아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어둡고 불분명한 사진. 그 어렴풋한 어둠을 본 기억이 있다. 자신의 기억들이 사실이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아이는 그때까지 혼자서 안고 있던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지금까지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알리고 싶었다.
-1 시작하는 이야기

......

"흠, 그런데 듣고 싶지 않다고 한 그 '과거'는 뭔데요?"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어머니와 열두 살 소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내 질문에 그 사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미간을 좁히고 시선을 내리깐 다음, 머리를 긁적이며 분명치 않은 소리로 대답했다.
"난...... 난 묘지에 있었거든."
"묘지?"
놀란 내가 묻자, 그 사람은 겨우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2 출발!

<웃는 늑대> 쓰시마 유코, 김훈아 옮김, 문학동네



 
2016-06-16

처음에 쓰시마 유코를 읽은 건 십년쯤 전,
서점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가 전혀 모르는 작가의 책을 샀다.
그 책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단편집 <나>
아, 책이 굉장히 좋았다.
역자 후기를 보고 작가가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 읽은 후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지만
번역되어 나온 건 그 책 한 권이었다.
그러다가 일이년 전 우연히, 그 사이 장편소설 두 권이 출간된 걸 알고 샀다.
그 중 한 권이 이 책,
<웃는 늑대>.
사 둔 걸 이제야 읽기 시작하며 인터넷을 찾아보니
작가가 올해 2월 2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2016-06-16
불빛이 번쩍이듯이 어느 창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거리와 그 높이에서는 약하고 마르게 보이는 어떤 사람이 불쑥 앞으로 몸을 굽히고는 더욱 앞으로 팔을 뻗었다. 누구일까? 친구일까? 착한 사람일까? 동정하고 있는 사람일까? 도우려는 사람일까? 그것은 한 개인일까? 모든 사람일까? 아직도 도움이 있을까? 잊었던 항변이라도 있는 걸까? 물론 그런 것이 있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논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고자 하는 사람에겐 저항하지 못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판사는 어디에 있는가? 결코 가보지 못했던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두 손을 쳐들고 모든 손가락을 쭉 폈다.
<소송> 카프카, 이주동 옮김, 솔



 
2016-06-02
"착각하지 말아요." 신부가 말했다. "제가 도대체 뭘 착각하고 있단 말입니까?" 카가 물었다. "당신은 법원에 대해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법의 서문에 착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씌여 있지요.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한 일이지.>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몸을 굽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 보시지. 그러나 알아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씨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보아도 나조차도 견딜 수가 없다네.> 시골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을 예기치 못했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털외투를 입은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모양의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걸상을 주며 문 옆쪽에 앉게 한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입장을 허락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 자세히 묻기 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나 건네는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아직 들여보내 줄 수 없노라고 문지기는 말한다.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장만해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받기는 하면서도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네>하고 말한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시골 사람은 거의 쉬지 않고 문지기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번째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 데 유일한 장해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사건을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으면서부터는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릴 뿐이다. 그는 어린애처럼 유치해진다. 그는 문지기를 수년간 연구하다가 그의 모피 깃에 붙어 있는 벼룩까지 알아보고 그 벼룩에게까지 자기를 도와 문지기의 마음을 바꾸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의 시력이 약해진다. 그는 자기 주변이 정말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그 어둠 속에서 그는 법의 문으로부터 꺼질 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광채를 알아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월의 온갖 경험들이 그가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못한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이제 굳어져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기력도 없어서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문지기는 그에게로 몸을 깊숙이 수그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몸 크기의 차이가 시고 사람에게 매우 불리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또 무얼 알고 싶은 건가?>라고 문지기가 묻는다. <끈질기기도 하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시골 남자가 말한다. <지난 수년 동안 저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가요?> 문지기는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에 다가와있다는 것을 알고, 희미해져가는 그의 청각에 들리도록 고함을 친다. <이곳에서는 자네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가 없네.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자네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네.>' "

소송, 카프카, 이주동 옮김, 솔

이 부분은
단편 소설 <법 앞에서>가 통채로 들어와있다.




 
2016-06-02
"당신이 요제프 카지요." 신부가 말하고는 난간 위에 놓았던 손을 이상하게 움직이면서 들어 올렸다. "그렇습니다." 카가 말했다. 카는 전에는 항상 자기 이름을 아주 솔직하게 불렀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얼마전부터는 자기 이름이 부담이 되었다. 이젠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까지도 자기 이름을 알고 있었다.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비로소 서로 알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당신은 기소당했지요?" 신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카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들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부가 말했다. "나는 교도소 신부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카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이리로 오게 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전 그런 줄 몰랐습니다." 카가 말했다. "저는 이탈리아인에게 성당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시오." 신부가 말했다. "손에는 무얼 들고 있나요? 기도서인가요?" "아닙니다." 카가 대답했다. "이건 도시 명소가 담긴 앨범입니다." "그런 건 내버리세요." 신부가 말했다. 카가 그것을 너무 힘껏 내던졌기 때문에 책자가 펼쳐지고 책장이 흩어진 채 얼마쯤 바닥 위로 미끄러져갔다. "당신 소송이 불리하다는 것을 아시오?" 신부가 물었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카가 말했다. "저로서는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도 없습니다. 물론 진정서도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결말이 어떻게 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신부가 물었다. "전에는 좋게 끝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카가 말했다. "이젠 이따금씩 그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은 아십니까?" "모르지요." 신부가 말했다. "그러나 나쁜 결말이 날까 봐 걱정입니다. 당신이 죄가 있다고들 생각하지요. 당신 소송 문제는 아마 하급 제판소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당신의 죄가 입증됐다고들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카가 말했다. "그것은 오류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말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하지만 죄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 "신부님도 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계신가요?" 카가 말했다. "난 당신에 대해 결코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카가 말했다. "하지만 소송 절차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편견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무관한 사람들한테도 그것을 주입시킬겁니다. 제 입장만 점점 더 곤란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실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판결은 갑자기 내려지는 게 아닙니다. 소송 절차가 서서히 판결로 넘어가는 거지요." "그렇군요." 카가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 사건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신부가 물었다. "도움을 구할 생각입니다." 카가 이렇데 말하고는 신부가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제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가능성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당신은 남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으려고 해요." 신부가 부정적인 투로 말했다. "특히 여자들한테서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도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어떤 경우, 아니 많은 경우에 신부님의 말씀이 옳겠지요." 카가 말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지요. 여자들은 큰 힘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에 제가 아는 몇몇 여자들을 저를 위해 공동으로 일하도록 움직일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법원은 거의 모두가 난봉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신판사한테 멀리서 여자를 한 명 보여줘 보세요. 그러면 그는 놓치지 않으려고 책상이나 파고 할 것 없이 넘어뜨리면서까지 달려올 겁니다." 신부가 난간 쪽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이제야 설교단 차양이 그의 머리를 내리누른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바깥은 날씨가 무척 사나운 모양이었다. 더 이상 흐린 낮이 아니라 이미 깊은 밤중이었다. 유리그림 그려진 몇 개의 큰 창문이 있었지만 그 흐릿한 빛만으로는 어두운 벽을 밝힐 수 없었다. 그때 성당지기가 중앙 계단 위에 있는 초를 하나씩 끄기 시작했다. "화가 나셨나요?" 하고 카가 신부에게 물었다. "당신이 종사하고 계신 법원이 어떤 곳인지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긴 제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할 뿐입니다만." 카가 말했다. 그때 신부가 카를 향해서 아래로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두 걸음 앞도 보지 못하나요?" 화가 나서 외친 소리지만,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서 놀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외친 소리 같았다.


<소송>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옮김, 솔

죄는 모른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체포당했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은 아무 제약없이 유지하고 있다, 아무 것도 강제하는 것은 없지만 모두가 자신이 소송을 당했고 피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송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원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모든 것이 법원과 관련이 되어있다, 무엇이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이상하지만 막상 읽어나가면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재판 과정이 꼭 그럴 것 같고
관료 집단, 공공 기관을 대하는 것이 실제로도 꼭 그럴 것 같은,
카프카의 세계.




 
2016-05-29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으로만 자유롭거나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해서 일시적으로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이런 식으로 당신이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얼마 동안 기소를 면하게 되지만, 그 기소는 계속 당신 머리 위에 떠 있어서 상부 명령만 내려지만 즉각 효력을 발생활 수 있습니다. 저는 법원과는 좋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법원 사무처 규정에 나타난 실제적 무죄 판결과 형식적 무죄 판결의 차이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나타나는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제적 무죄 판결이 날 경우 소송 서류들은 완전히 기각되어 버리고 소송 절차상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기소장뿐만 아니라 소송 기록 그리고 심지어 무죄 판결문까지도 취하되고, 모든 것이 소멸됩니다. 형식상의 무죄 판결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지고 서류는 분실되어 무죄 판결이 완전한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서류는 분실되는 법이 없으며, 법원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날-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합니다-어떤 판사가 그 서류를 손에 들고서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 사건의 기소가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고서 즉각 체포를 지시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형식적인 무죄 판결과 새로운 체포 사이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가정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는 다른 가능성 역시 있는데,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법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그를 체포해가기 위해서 위임받은 관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자유로운 생활은 끝장이지요." "그럼 소송이 새로 시작되나요?" 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 "그렇지만 이 두 번째 무죄 판결도 최종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카는 이렇게 말하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최종적인 것은 아니지요." 화가가 말했다. "두 번째 무죄 판결 다음에는 세 번째 체포가, 세 번쩨 무죄 판결 다음에는 네 번째 체포가 따르고, 계속 그런 식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

<소송>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옮김,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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