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6-02-25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2016-02-22
황정은은 팟캐스트에서,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쓴다고 의식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평론가가 쓴 걸 보고 아, 그렇구나 우리가 가난했구나 동생과 이야기 했다고 한다.
황정은의 동생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우산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울었다고 한다, 어려서 같이 겪었던 일상이라.



 
2016-02-13
디디는 자기 우산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전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학교까지 달려갈 때가 많았고 오후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디디는 비가 좋았고 우산 때문에 비가 싫었다. 우산은 괜히 비싼 물건이었다. 디디의 집에서는 살대가 휘고 천이 말려올라간 우산 몇개를 네 식구가 공용했고 대개 모자라서 남는 일이 드물었다. 자기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낡은 우산으로 잃어버린 우산을 갚음할 수는 없었다. 디디는 도도에게 우산을 잃어버렸다고도 새것을 사주겠다고 말하지 못한 채로 국민학교 졸업반을 다녔다. 도도는 우산을 재촉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엔 다른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빌려준 우산에 관한 것은 잊은 듯이 무심했으나 디디는 도도와 도도의 우산을 신경썼다. 우산 하나를 빚졌다는 생각에 비 오는 날엔 마음이 무거웠다. 도도의 목소리를 듣거나 도도가 근처에 있으면 고리 모양의 우산 손잡이가 목에 걸린 것처럼 그쪽 방향으로 몸이 무거워졌다. 도도와는 본래 자주 말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 더욱 말을 나누는 일 없는 사이가 되어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디디의 오라비는 포클레인 기사를 단념하고 군대에 들어갔다가 더 말수 적은 오라비가 되어 돌아왔다. 디디의 아버지는 여전히 허리병을 앓았고 디디의 어머니는 생선 좌판을 넓히느라고 종래 가지고 있던 빚에서 빚을 조금 더 얻었다. 디디는 중학교에서 상업고등학교로 진로를 잡아 취직했다. 첫 급여를 받은 이후로 여러가지 물건을 자기가 번 돈으로 샀고 그 가운데 우산이 종종 있었다. 디디는 식구 수에서 한 개나 두 개쯤 더해서 우산을 갖춰두었다. 서너 차례 비가 지나가고 나면 누군가 우산을 잃어버려 우산 수가 줄었다. 디디는 우산을 사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불평 없이 또 우산을 사다두었다. 비 오는 아침엔 차분하게 자기 몫의 우산을 펼치고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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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가 가라앉고 가치를 고정하는 데 몇달이 걸렸다. 디디는 이가 부러지는 장면을 최고 끔찍한 장면으로 이가 부러지는 꿈을 최강의 악몽으로 여겼다. 몇번인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열 시간 근무에 세금을 빼고 백만원씩 지급받았고 버스로 한 시간이 넘는 통근 거리를 오가는 일이 고달팠다. 계산대를 향해 몰려드는 물건들의 값을 계산하는 일은 물건을 상대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사람만큼 피곤한 것이 없었고 써비스 직원을 상대하는 고객만큼 거칠 것 없게 공격적인 사람들도 드물었다. 모피를 입고 강아지를 안은 여자의 물건값을 계산하다가 욕을 했다고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하품을 참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말로는 한밤에 잠을 자다가 안녕하십니까 식자재 센터입니다,라고 힘차게 외쳐서 식구들을 깨우는 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디디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곰곰이 자기 나이를 생각해보고 막연하게 다른 일을 꿈꿨다. 일년 육개월을 채우자. 그뒤에 미련없이 그만두자고 마음먹었다. 사고로부터 일년 이개월이 지나서야 디디는 일년 육개월에 관한 이야기가 허구이고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디디는 뭐야, 하며 하하 웃었다. 내일이라도 그만두자 그만둬. 아침 버스에선 그렇게 생각하고 저녁 버스에선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으니 조금만 더,라고 생각했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중
'디디의 우산'
창비




 
2016-02-13
밤은 춥습니다. 파씨가 사는 방은 북쪽 벽이 갈라진 커다란 방이고 그 방은 난방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체온은 일정하므로 그대로 누워 있으면 언젠가는 바닥이 데워질 것이라고 파씨는 생각하지만 바닥은 언제까지나 바닥으로서 차가울 뿐이라서 금번에도 파씨의 등은 물고기의 척추처럼 싸늘합니다. 파씨의 어머니는 이불 속에서도 외투를 벗지 않습니다. 파씨의 아버지도 겉옷을 벗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방에서 서로간에 우울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말을 나누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때로 다툽니다. 최종적으로 다퉁이 가장 격렬한 순간엔 언제나 묵언입니다. 그들이 서로의 털을 뽑고 얕은 곳의 핏줄을 터뜨리고 서로의 피부를 잡아 뜯으려는 노력으로 부산하게 발로 바닥을 디딜 때, 파씨는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입김을 피해 입을 닫고, 사라집니다. 책상이 되고 옷걸이가 되고 벽이 되어 아무도 파씨를 발견할 수 없도록 그 방의 일부로 녹아버립니다. 그럴 때 아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고 문밖에서 옆방 청년이 중얼거리고, 파씨는 이제 그만뒀으면 하는 것이 그 가난한 청년인지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파씨인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사투하는 어른들을 지켜보는 도중에, 파씨가 이때까지 그들의 파편으로부터 얻어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에 파씨에 대한 한 줌 도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파씨가 거의 완벽하게 그들로부터 파씨를 숨겼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파씨는 학교에서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통에 매혹됩니다. 그건 번쩍거리는 은빛이고, 산뜻하게 주름져 있고, 청결해 보이는 김을 무럭무럭 내뿜고 있습니다. 내부가 얼마나 따뜻해야 연통이 김을 뿜을 수 있을까, 파씨는 연통으로 빨려들어가서 연통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눌러붙어서 연통의 따뜻함의 일부가 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고 손과 발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파씨는 두 개의 채널이 수신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보자기로 머리를 감싼 걸인이 거리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울고 있습니까. 기자가 묻자 그녀는 여러겹으로 지직거리며 너무 추워서,라고 대답합니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중
'파씨의 입문'
창비


 
2016-02-13
아랫배가 납작해졌습니다. 빨간 밀떡 같은 살덩어리가 팽의 눈이 있던 구멍을 꾸역꾸역 메우고 있었습니다. 팽은 그저 토끼로서 팽일 뿐이었는데 이제 범상하게 타이어에 눌려 죽은 토끼가 되어서, 말의 은밀한 은유로서 파씨의 밑바닥에 단추처럼, 실을 단단히 잡아당겨 달아놓은 단추처럼 붙들려 있습니다. 뒈지라고 말하면 뒈지는 거다. 파씨는 입을 닫고 파랗게 질려 팽을 내려다봅니다. 뭉툭한 팽의 앞발을 바라봅니다. 팽이 팟, 귀를 텁니다. 바닥으로부터 분리되려고 노력합니다. 일어납니다. 직립합니다. 잡작해진 부분과 볼록해진 부분의 불균형으로 얼마간 비틀거립니다. 두 개의 귀를 교묘한 각도로 벌려서 중심을 잡고 선 뒤에 형편없는 모양이 된 아랫도리를 내려다봅니다. 앞발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부지런히 쓸어내려서, 납작해진 아랫배를 본래의 자루 모양으로 볼록하게 되돌려 놓습니다. 뒷발을 타닥 털어봅니다. 빙글빙글 눈을 문지릅니다. 눈에서 발을 떼고, 촉촉하게 되돌아온 까만 눈으로 파씨를 봅니다.
아 깜짝이야.
팽이 조그만 앞발로 가슴을 누르며 말합니다.
죽었어, 죽어버렸어.
폴짝폴짝 뛰어 사라집니다.
라면 한 개만 끓여줘.
파씨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파씨는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먹습니다. 불을 켜고 물이 끓기를 기다립니다. 끓는 물에 마른 면을 넣고 분멸수프를 풀고 냄비를 들여다봅니다. 물이 끓을수록 파씨는 이것을 끓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냄비를 집어 벽에 내던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럴 수 없다와 그러고 싶다의 간격에 간장의 농도로 농축되는 분노를 욕으로 발설합니다. 씨발년이 내 토끼 팽을, 어쩌고 욕을 냄비에 붓습니다. 냄비가 독하게 끓습니다. 그것을 어머니에게로 가져갑니다. 파씨는 파씨의 어머니가 그것을 음독하기를 원합니다. 독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봅니다. 파씨의 어머니는 담요를 끌어올리며 냄비 속을 들여다봅니다. 국물을 묽고, 야채는 조금도 없고, 한 올도 풀리지 않은 면이 국물의 윗부분에 통통 불은 채로 떠 있는 냄비 속으로 눈물울 뚝뚝 떨어뜨립니다. 파씨는 굉장히 놀라서 그녀를 바라봅니다. 머리숱은 적고 눈꺼풀을 붓고 목과 어깨와 가슴이 늙어버린 그녀를 발견합니다. 파씨는 손가락을 비틀며 서 있다가 그녀가 그것을 음독하기 전에 냄비를 가로챕니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중
'파씨의 입문'
창비



 
2016-02-06


황정은 단편집 <파씨의 입문> 황정은, 창비
에 묘씨생.

 
2016-02-06
"내 시선은 생각에 잠겨 명상을 하는 사람의 시선이네. 그 점은 인정하지. 그러면 자네의 시선은? 자네는 군도와 툰드라 지대, 산맥을 가로지르며 여행을 하네. 그런데도 자네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
마르코 폴로는, 머나먼 도시의 낯선 지역에서 길을 잃으면 잃을수록 거기에 도착하기 위해 지나왔던 다른 도시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여정을 다시 훑어보게 되며, 닻을 올렸던 항구, 젊은 시절 친숙했던 장소들, 그리고 집 주위, 그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베네치아의 광장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대답하는 상상을 했다. (아니 쿠빌라이가 그런 대답을 상상했다.)
......
마르코 폴로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항상 자기 앞에 있는 무엇인가였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혹은 설명한다고 상상하거나 설명하는 게 상상이 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려면, 이 모든 것이 다 해당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비록 과거의 문제라 해도 그 과거는 그가 여행을 해나가는 동안 서서히 변해왔다. 여행자의 과거는 그가 지나온 여정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루가 덧붙여지는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아주 먼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여행자는 그가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혹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의 이질감이, 낯설고 소유해 보지 못한 장소의 입구에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마르코가 어떤 도시로 들어간다. 그는 광장에서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을 삶을, 혹은 그런 한 순간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 그가 아주 오래전 시간 속에서 멈춰 섰더라면 혹은 갈림길에서 선택했던 쪽의 정반대 길을 선택해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다가 그 광장의 그 남자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더라면, 지금은 마르코 자신이 그 남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과거든 아니면 관념상의 과거든, 이제 마르코는 자신의 과거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는 멈춰 설 수가 없다. 그는 그의 다른 과거, 혹은 그의 미래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현재가 되어버린 무엇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도시까지 계속해서 가야만 한다. 실현되지 않은 미래들은 과거의 가지들일 뿐이다. 마른 가지들.

제2부


 
2016-01-29
더 힘차고 더 긴 함성이 테라스 밑에서 발밑에까지 밀려와 오래도록 메아리치는 가운데, 온갖 빛깔의 불꽃 다발들이 점점 그 수를 더해 가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의사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들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이화영 옮김, 민음사



 
2016-01-27
이제는 길모퉁이에서, 카페나 친구네 집에서,평온하고도 무심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게다가 또 어찌나 따분해하는 눈길인지 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대합실만 같았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일을 페스트와 똑같은 보조로, 즉 소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해 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겸손해졌다. 처음으로 그들 생이별당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헤어져 있는 사람 얘기도 하고, 제삼자 같은 말투를 쓰기도 하고,  자기들의 생이별 상태를 전염병의 통계 숫자와 똑같은 시각에서 검토해 보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한사코 집단적인 불행과 떼어서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두 문제를 섞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로 변해 버렸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결국 그 별거당한 사람들은, 초기에 그들을 보호해 주었던 그 야릇한 특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에고이즘과 거기서 얻는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사태가 명백해졌고, 재앙은 모든 사람에게 다 관계가 있는 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시의 문에서 울리는 총소리며, 우리들의 삶 또는 죽음에 박자를 맞추어 주는 고무도장 소리의 한가운데서, 화재와 카드, 공포와 수속 절차 속에서, 굴욕적이면서도 대장에 등록된 죽음과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무시무시한 화장터의 연기와 구급차의 한가한 사이렌 소리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어처구니없는 재회와 평화의 시간을 똑같이 기다리면서 똑같은 유배의 빵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우리들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건만, 단지 그것은 무용지물이어서, 지니고 다니기에만 무거울 뿐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생기를 잃어, 마치 범죄나 유죄판결과도 같은 불모의 존재였다. 그 사랑은 이미 미래가 없는 인내에 불과했고 좌절된 기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시민들 중 어떤 사람들의 태도는 시내 곳곳의 식료품 가게 앞에서 줄을 선 그 긴 행렬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동시에 환상도 없는 똑같은 체념이었고 똑같은 참을성이었다. 다만 생이별에 관해서는 그 감정을 천배 이상의 단위로 확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생이별은 또 하나의 굶주림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집어삼켜 버리는 굶주림이니 말이다.
......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그때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테라스 쪽으로 올라오는 것은, 으레 도시의 언어를 이루게 마련인 차량과 기계 소리들 대신 둔탁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웅성거림뿐이었는데, 그것은 무겁게 덮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윙윙거리는 재앙의 휘파람 소리에 리듬을 맞추는 수천의 구두창들이 고통스럽게 미끄러져 가는 소리였으며, 차츰차츰 온 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끝없고 숨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 그리고 그 당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맹목적인 고집에다가 저녁마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음울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저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이화영 옮김, 민음사

 
2016-01-27
그동안에 인접한 교외 지역들로부터 봄은 여러 시장들속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장미꽃 수천 송이가 인도를 따라 나앉은 꽃 장수들의 바구니 속에서 시들어 가면서 그 달콤한 향네가 온 시가지에 감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러시아워가 되면 전차는 여전히 만원이었다가 낮이 되면 텅 비고 더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타루는 그 작달막한 노인을 관찰하고 있었고 그 노인은 고양이들에게 가래침을 뱉어 댔다. 그랑은 그의 신비한 일을 위해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코타르는 쳇바퀴 돌듯 맴돌고 있었고 예심판사인 오통 씨는 여전히 그의 구경거리 동물원을 이끌고 다녔다. 늙은 해수병자 노인은 콩을 옮겨 담고 있었고, 태연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표정인 신문기자 랑베르도 가끔 눈에 띄었다. 저녁때면 변함없는 인파가 거리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영화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모여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유행병이 수그러져 가는 듯싶었다. 며칠 동안 사망자의 수는 불과 십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가 다시 서른 명으로 늘어난 날,베르나유 리유는 "저들이 겁을 먹었소." 하며 지사가 내미는 전보 공문을 받아 읽었다. 전보에는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고 적혀 있었다.

1부 끝

<페스트> 알베르 카뮈, 이화영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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