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23-06-26

스피노자의 사유는 존재에 대한, 생명/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이며, 여기에는 각 존재의 자율성 - 임의대로/우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에 따라서 행위할 수 있는 힘 - 도 포함된다. 그리고 같은 본성을 가진 개체들이 힘을 합할 때 그들의 고나투스와 행복 또한 그만큼 커진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인간만큼 유익한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해가는 데에는 "그들의 몸과 마음이 말하자면 하나의 몸과 마음과도 같이 모든 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 그들이 함께 자신들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함께 모두의 공통된 유익함을 지향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이성에 인도되는 사람, 즉 이성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유익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타인들을 위해 욕망하고, 타인들에게 정의롭고 신망 있으며 고결한.정직한 존재가 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각자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기는 커녕 도덕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 공동체 -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자유인들의 공동체, 현자들의 공동체 - 가 바로 스피노자적 뉘앙스에서 유토피아일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복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면서, "하지만 고귀한 모든 것들은 어렵고 또 드물다"라는 말로 <에티카>를 끝내고 있다.

스피노자의 세계는 존재가 곧 생성인 역동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현대 생성존재론의 선구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초월적이고 목적론적인 중세적 세계와 거대한 단절을 이루는 세계이며,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데카르트의 세계와도 대조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신적 표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유한양태로서의 인간은 우연적 힘들의 장 속에서 표류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삶의 극복을 위해 어떤 초월적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인간의 정신도 데카르트에게서와 같은 초월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신체를 떠난 존재가 아니듯이 인간의 신체 또한 정신을 떠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은 이성적 사유와 능동적 감정을 푯대로 삼아 신에 대한 사랑과 지복의 경지에 다가갈 수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의 생애와 더불어 그리고 이 양자의 연계성에 있어, 우리에게 경탄의 염과 더불어 다가온다. 그는 삶에서 겪은 모든 극악한 경험들을 초연하게 소화해내고, 스스로 택한 가장 낮은 곳에서 충만한 영혼으로서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대의 가장 찬연한 철학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다소 단적으로 말해, 스피노자 이후의 철학이란 결국 <에티카>를 새롭게 써 나가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헤겔의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당신은 스피노자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철학자가 아니다."


<세계철학사3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 이정우, 도서출판 길





 
2023-06-19

철학책 작업을 하면서 하는 생각.
이 작업은 제안이 들어왔을 때 좋았고 작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어떻게 해야할 지 길을 못 찾아서 오래 헤맸고 괜한 시작을 했다는 후회를 많이 했다. 못할 일을 시작했다고.
지금은 재미있고 처음 어느 정도 분량의 원고를 스케치 상태로 출판사에 보냈을 때는, 밤에 보냈는데 보내느라 그동한 작업한 것을 다시 보고 다시 보면서 생각하고 조금씩 수정하여 보낸 후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정말 두근거리며 이 작업 너무 재밌다! 너무 재밌다! 속으로 몇 번이나 말했다.
지금은 다시 풀숲을 헤매듯이 헤매며 요소들을 찾고 쌓아가고 있지만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졌을 때 느꼈던 그 기쁨을 알고 있어서 작업이 힘들지는 않다.
재미있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다.
이 철학이라는 분야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면들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화라는 형식을 그리므로, 더 대중적인 취향, 장르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약점이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후로. 하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이것이 나의 취향이고 기호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약점도 아닐 것이다. 이런 책들에 대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발터 벤야민도 마찬가지이다.
학술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았지만 산문들을 좋아한다. 더 알아보고 더 좋아할 것이다.




 
2023-06-17


들뢰즈 작업 때문에 도서관 철학 칸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빌렸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윤미애, 문학동네 스투디움 총서09


너무나 좋아했던 <일방통행로>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요즘 책은 철학책만 읽고 있고 사실 예전처럼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작업과 책읽기에 보내지를 못해서 얼마나 읽고 반납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아했던, 정말 좋아했던 책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한동안은 감정적으로 너무 좋은 것들을 분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설명하는 책들을 읽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책을 읽던 느낌, 기분 그것만 가지고 있고 싶었다. 휘발되기 쉬워 보이는 그대로. 이 책을 잠깐 빵집에서 서문만 읽으면서 그리고 집에 와서 초반 조금 읽으면서 좋았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것들을 제대로 좋아하자, 더 알아보고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이 표현한 것들을 보면서 좋아하자 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잠을 자려고 누워서 좋아했던 것들을 잘 생각하자 다시 생각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자.





 
2023-06-11


사랑에 빠진 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우정은 관조와 대화를 양분삼아 자라날 수 있는 반면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서 나타난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해야 할, 다시 말해 해석햐아 할 한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함축되어 있고 감싸여져 있으며 마치 수형자처럼 갇혀 있다.

역주) 가능세계(혹은 타자)
들뢰즈는 타자의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사물과 내가 사유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변두리의 세계, 즉 ...... 배경을 조직하는 것>(의미의 논리,1969)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사물 세계에 한정지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대상의 어떤 부분을 내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나는 이 부분이 나에게는 안 보이지만, 동시에 타자에게는 보이는 부분으로 여긴다. 그 결과 내가 대상의 이 숨겨진 부분에 도달하려고 할 때, 나는 대상 뒤에 있는 타자와 결합하고, 그리하여 이미 예측했던 전체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사물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투사성 때문에 우리는 늘 사물의 일부분만을 지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지각되지 않는 부분까지 종합하여 대상을 체험한다. 들뢰즈는 어떻게 이런 체험이 가능한가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가능한 까닭은 <돌연히 타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제든 중심에 올 수 있기는 하지만 내 주의력의 변두리에 위치하는 대상들의 세계에 희미한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변두리에 있는 그런 존재가 현존한다는 앎과 느낌은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내 뒤에 보이지 않는 대상들이 세계를 형성하리라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은 타자에게 보일 것이고, 타자에 의해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타자가 없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는 절대적으로 모르는 세계이다. 내가 있지 않은 모든 곳은 현실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암흑이 군림한다..... 세계는 잠재태가 없는 암흑으로 덮이고, 가능성의 범주는 파괴된다.>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각하고 있을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만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바와 같은 하나의 전체화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자를 통해서, 이 전체화된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우리 의식은 구성된다. 그런데 이런 타자의 역할은 대상 인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는 정서적인 측면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지각 활동 속에서 역할한다. 들뢰즈는 <타자의 얼굴<을 언급하면서 이 점을 설명한다. <무서음에 질린 얼굴을 생각해 보자(단 내가 그 무서움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이 얼굴은 하나의 가능 세계, 즉 무서운 세계를 표현한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 지금 내가 현실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부분까지 통틀어 전체로서 하나의 무선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엔 잠재적으로 타자의 시선이 가 닿아 있으리라 여기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잠재적으로 타자의 귀가 들으리라고 여긴다. 이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타자를 <가능 세계의 표현> 혹은 <지각장의 구조>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타자는 내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가능 세계 혹은 잠재적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런저런 개별자인 <구체적인 타자>라기 보다는, 하나의 완전하게 통일되고 조직화된 지각장을 가능케 해주는 <선험적 타자>이다. 타자의 <눈은 가능한 빛의 표현이며 귀는 가능한 소리의 표현이다>, <가능 세계는 오로지 표현된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역으로 타자에게 눈과 귀가 없다면 우리는 빛과 소리가 있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타자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만을 우리가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지각 못하는 부분에는 타자의 지각이 닿아 있고 그러므로 해서 <타자는 세계에 있어서 그 여백을 보증해준다>. 이는 결국 타자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세계를 체험하는 우리 의식의 근본 구조를 가능케 함을 의미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
질 들뢰즈, 서동욱 이충민 옮김, 민음사





 
2023-04-20

그리고 베르그손

'따라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철학에 비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곳에는 차이 개념에 대한 아주 심오한 연구가 있다. 아울러 우리는 비결정 또한 더 이상 애매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결정, 예측불가능성, 우연, 자유는 언제나 원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실제로 베르그손이 수많은 우연으로 짜여진 생의 약동을 경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베르그손은 사물은 사물 자신의 원인들에 앞서서 온다는 것을, 그리고 원인들은 이처럼 사물 이후에 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사물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결정이라는 것이 사물이나 행위가 다른 무엇일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위는 다른 무엇일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 없는 공허한 질문이다. 베르그손이 원하는 것은 왜 사물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인지를 이해시키는 일이며, 이때 사물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그 사물의 원인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의 차이인 것이다. 베르그손은 말한다. "행위 자체의 그 어떤 뉘앙스나 질 속에서 자유를 찾아야 하지, 그 행위가 아닌 다른 것과 그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거나 또는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과 그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아서는 안된다" ... 베르그손주의는 차이가 그 자체로서 있다는 것, 차이는 새로움으로서 실현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14.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

질 들뢰즈,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04-18

이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즉 철학도 다른 모든 분야만큼이나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분과이고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거나 고안해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개념들은 한 철학자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기다리면서 하늘에서 다 만들어진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ㄱ념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물론 이처럼 개념들이 스스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봐, 나는 이런 개념들을 고안해 낼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화가가 어느 날 "봐, 난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될거야"라고, 혹은 한 영화 감독이 "봐,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철학에서도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창조자는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창조자는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 뿐입니다. 아무튼 이 필요 - 이 필요가 있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한 것입니다 - 때문에 철학자 - 저는 최소한 철학자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 는 개념을 창조하거나 고안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철학이 [어떤 것에 대한] 성찰에 몰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

철학에 빠져든다, 빠져든다...



 
2023-04-16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물들 사이로 빠져들어가는 일, 우리가 그곳에서 다른 것과 결합하는 일은 [입자들의] 빠름과 느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결코 새로이 시작하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백지 상태를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환경 사이로 빠져들어가고, 환경 속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리듬을 받아들이거나 리듬을 부여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변용들을 미리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길고 긴 작업이며, 내재성의 평면 또는 고름의 평면의 건설을 함축하는 길고 긴 스피노자적 신중함과 지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윤리학⌋은 도덕을 하나의 비교행동학으로서 받아들인다. 즉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입자들의]빠름과 느림이 이루는 구성으로서,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이 이루는 구성으로서 도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은 진정한 외침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신들은 그 일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떠나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또는 영혼이 이런저런 만남, 배치, 구성 속에서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신체에 대하여 지도제작을 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제작된 지도의 경도와 위도를 합친 전체는 언제나 가변적인, 그리고 개체와 집단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건설되며 재건설되는 자연이라는 평면, 즉 내재성의 평면 또는 고름consistance의 평면을 구성한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박정태 옮김, 이학사
5.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 씨의 매력을 알아가기.

그런데 철학은 늘 번역의 문제가 있고
고름의 평면은 consistance-견고함, 고밀도, 견실함, 안정성, 일관성 등의 의미를 '고르다'(울퉁불퉁하지 않다)의 명사형으로 '고름'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나는 자꾸만 몸에서 나오는 고름이 생각이 나서 단어를 보았을 때 원래 의미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2023-04-11
되찾은 시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여러 번 내 앞에 다시 나타났으며, 그때마다 다른 상황이 그 동일한 사람들을 내게 얼마나 다양한 형태와 목적 아래 제시하는 듯 보였던가. 각각의 인물이 짠 실타래가 통과한 내 삶의 여러 다양한 지점은 지극히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마치 삶이 가장 다른  형태의 무늬를 짜기 위해 제한된 수의 실타래만을 소유한다는 듯 마침내 섞어 놓았다. 이를테면 나의 다양한 과거에는 아돌프 할아버지를 방문했던 일을 비롯하여, 원수의 여사촌인 빌파리지 부인의 조카, 르그랑댕 씨와 그의 여동생, 우리 집 안마당에서 살던 프랑수아즈의 친구이자 조끼 짓는 전직 재봉사 등이 있었는데, 그들보다 더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오늘 이 모든 상이한 실타래가 이야기의 골조를 짜기 위해 한데 모였고, 여기는 생 루 부부, 저기는 젊은 캉브르메르 부부, 또 모렐은 말하지 않더라도 다른 많은 이들의 결합이 일련의 상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므로, 내게는 이 상황이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면서 각각의 인물은 다만 그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 삶은 삶이 내게 제시하는 존재 중 하나 이상이 내 기억의 반대편에서 그 존재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이미 긴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만났으며, 이제 자신의 명성에 어울리는 자리를 차지한 엘스티르만 해도, 나는 그에게 베르뒤랭 부부와 코타르 부부, 리브벨 레스토랑에서의 대화, 내가 알베르틴을 만났던 오후 모임과 같은 가장 오래된 추억들을 덧붙일 수 있었다. 이처럼 어떤 예술 애호가는 누군가가 제단화 한 폭만 보여주어도 다른 폭이 어느 성당, 어느 박물관, 어느 개인 소장품에 분산되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는 머릿속에서 제단화의 밑부분을, 더 나아가 제단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 권양기를 따라 올라가는 통이 여러 번에 걸쳐 반대쪽에 걸린 밧줄을 건드리는 것처럼, 내 삶에서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나 하물며 사물들조차 차례차례로 번갈아 가면서 상이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없다. 단순한 사교 관계나, 물질적인 대상이라 해도 내가 몇 해 후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날 때면, 나는 삶이 그 대상 주위에 부단히 다른 실들을 낫다가, 마치 오래된 공원의 하찮은 수도관을 에메랄드빛 칼집으로 에워싸는 벨벳처럼, 세월의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벨벳에 의해 그 대상의 울림을 약화시키는 것을 보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민음사

 
2023-04-09
'형이상학도 신학도 혹은 자연과학도 인간의 언어와 사고에는 결코 이르지 않는 실재를 인간의 외부에 설정하고, 종종 현실과 이념, 이곳과 저편, 주체와 객체를 이분하는 세계관에 의해서 인간적 현실을 국한하고, 세계와 인간을 분단해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언어와 사고 속에서 생기하고, 이것에 의해서 제작되고, 영향받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국가와 경제 같은 공공성의 차원에서 생겨나고 있는 사태, 또 우리가 자연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상조차 우리의 관점, 사고, 언어의 바깥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에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고,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 '비실제론(인간은 인간 외부의 무한한 넓이 속에서 극히 일부이다)와 '프래그머티즘'(모든 사상이 인간의 행위와 사고에 관계되어 있다)은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이지만, 어느 쪽이나 인간의 영역을 영원히 고정된 현실로 간주하고, 다양한 운동과 진동으로부터 절연하고자 하는 사고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실재론'은 고정된 인간적 현실의 바깥에서 인간을 고쳐 응시하고, '프래그머티즘'은 그렇게 하여 한 번 개척된 인간의 지평에서, 일상의 실천과 경험을 구성하는 운동과 진동에서 인간을 고쳐 파악한다.

철학의 민주화란 철학의 비민중적 요소, 즉 인간적 현실을 고정된 실체에 가두고 또 생의 현실적 과정에서 분리하는 경향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비민중적 사고를 해체하는 공공성과 전달 가능성을 향하여 사고를 확장하고 단련하여 가는 것일 뿐이다.'

- 프롤로그 중

'확실히 '기쁨'은 들뢰즈에게 있어서 단순한 취미와 기분의 문제는 아니었다. 또 니체주의의 지속이라고 하는 틀에 알맞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낙천주의를 원천으로 하는 사고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생명과 관계되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관계되는 것이다.

미리 존재한다고 간주되고 생성과 운동을 배척하고 고정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 주체와 이성과 지식과 표항에 언제나 저항하고, 그것들과 일체인 도덕, 정치, 권력에 대항하고자 했다.

'미래'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부분 기지의 사항에 의지하여 가장 현저하게 보이는 지표에 따라서  이야기하고 있음에 불과하고 예지의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제나 구제할 길이 없을 정도로 과거의 이미지에 의지하여 그 이미지를 반복하면서 과거조차도 잘못 읽고, 미래를 상기하지마 그것이 반복인 것 자체를 생각해 보는 일은 드문 것이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어중간한 과거(현재랑 과거의 산단-앞쪽의 끝-이다)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미리 과거도 미래도 국한하면서 미래에 관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화적 문맥을 벗어나서 '영원회귀'에 관하여 이상할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했던 니체와 들뢰즈는 필시 미래를 생각하는 데서도 상당히 다른 양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사고가 근본적으로 빈약하고 종종 점과 예언어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그저 과거의 국한된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태 그 자체를 잘 생각할 수 없는 채 심신 만은 끊임없이 미래로 내보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에 관해서도 우리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쁨의 철학'은 죽음의 미래에 대한 가능한 한 정확한 계측과 지식과 함께 있을 것이고, 그러한 계측과 지식은 이미 과거의 민중의 사고 속에 면면이 실재하여 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강력한 두뇌를 가진 사상가들도 결코 이 문제를 끝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철학하기 위해서 동물이 되는 것, 결코 들뢰즌ㄴ 역설을 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영역과 인간 바깥(동물, 식물 물질 등)의 영역가의 관계 그 자체를 끊임없이 재고하는 것은 그의 철학의 커다란 모티프였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 인간과 사물, 그 사이의 연속과 불연속을 미세한 진동(차이)에서부터 거대한 구성에 이르기까지 동적으로, 횡단적으로 파악하여 사고의 정지와 죽음에 대항하는 것은 언제나 기본적인 자세였다. 그러한 시야에서 시공을 관통하는 어떤 법칙들을 확립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반복하고 변화하는 '사건'들을 감지하고자 했다.
자연은 노스탤지어도 유토피아도 아니며 끊임없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리얼리티이고, 인간의 영역 어디까지에나 침투하면서 그런데도 외부성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을 둘러싼 정동이 혹은 파토스가 들뢰즈의 철학을 언제나 깊은 곳에서부터 생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기쁨의 철학'으로 표출되었다.

<들뢰즈, 유동의 철학> 우노 구니이치 지음, 이정우, 김동선 옮김, 그린비

-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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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작업 준비하면서 처음 끝까지 읽은 책.
재미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부분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하지만 다른 책들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았고 설명도 비교적 쉽게 되어 있었고 사실은 재미있었다. 철학이 이런 학문이군,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부분에서 마음을 건드리는 학문이구나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이후에 읽은 책들도 '재미'와 '어려움', '더 알고 싶다'와 '여긴 내 영역은 아니다'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책들이 대부분.
작업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전혀 모르겠고-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에 비해 책 자체는 평이하게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 사실 철학이 너무 생소한 분야이므로, 내 언어로, 내 이야기로 표현하기에는. 하지만 책이 끝나보면 계속 취미로 철학책을 읽을지 말지 결정이 되겠지.




 
2023-03-18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주는 매우 수학적이다. 어쩌면 신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우주는 이런 우주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수도 있는데, 비수학적 우주에는 이런 질문을 던질 만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우주가 항상 미적분학 언어를 사용해 미분방정식이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사의하면서도 경이로운 사실이다. 미분방정식은 지금 이 순간의 어떤 것과 다음 순간의 그것 사이의 차이를, 혹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과 무한히 짧은 순간 전후의 그것 사이의 차이를 기술한다. 세부 사항은 우리가 다루는 것이 자연의 어떤 부분이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법칙의 구조는 늘 똑같다. 이 경이로운 주장을 달리 표현한다면, 우주에는 암호 비슷한 것, 즉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종의 운영 체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우주는 미천한 우리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의 논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논리가 작용하는 방식을 존중하며 따를까? 아인슈타인이 "세계의 영원한 수수께끼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경이로움을 표현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유진 위그너가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효율성에 관해>라는 제목의 눈문에서 "물리학 법칙의 기술에서 수학 언어가 지난 적절성의 기적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누릴 자격도 없는 경이로운 선물이다."라고 한 것도 그런 뜻에서 한 말이다.'

<미적분의 힘 Infinite Power>
스티븐 스트로가츠, 이충호 옮김, 해나무


재미있게 읽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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