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3-04-06
사는 기쁨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

5
...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황동규 <사는 기쁨>






 
2013-03-30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는 파노라마가 가장 화려한 풍경을 자랑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뒤였다. 그러나 그 매력의 마지막 관객이었던 어린이들에게 파노라마의 매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매력은 어느 날 오후 소도시 엑스가 나오는 영사막 앞에 앉은 나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내 삶의 어느 때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에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올리브색 햇빛이 쏟아지는 그곳 미라보 광장에서 놀았던 적이 있다. 그러한 여행에서 진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먼 세상이 언제나 낯선곳은 아니고, 또한 그곳이 내게 불러일으켰던 동경이 언제나 미지의 세상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오히려 가끔은 집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동경일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아주 은은하게 모든 것을 비춰주던 가스등 불빛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50개의 사진들이 정확하게 두 개의 대열로 나뉘어 있는 포스터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나는 피오르드 해안이나 야자수에 비치는 불빛에서 저녁에 숙제 할 때 내 책상을 밝혀주는 기묘한 느낌의 어스름이 생기고 파노라마의 풍경에서 빛이 사라질 때도 있다. 그럴 때 풍경은 잿빛 하늘 아래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여전히 바람소리와 종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이저 파노라마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13-03-24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 잔 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이별 없는 시대
황동규 <사는 기쁨>

아주 오랜만에 산 시집. 칠십대 중반 노시인의 시집.




 
2013-03-24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것은 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헤매는 사람에게 거리의 이름들이 마치 마른 잔가지들이 뚝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움푹 패인 산의 분지처럼 시내의 골목들이 그에게 하루의 시간 변화를 분명히 알려줄 정도가 되어야 도시를 헤맨다고 말할 수 있다.
티어가르텐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13-02-25

나는 언제나 난바다에서, 위협을 받으며, 당당한 행복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까뮈, 가장 가까운 바다 항해일지




 
2013-02-15

<결혼,여름> 알베르 까뮈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3-02-13
<레 카이에 뒤 쉬드>를 받았습니다. 사르트르의 글은 '분해'작업의 한 표본이라고 할 만 합니다. 물론 모든 창작에는 작가가 예상하지 못했던 본능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지성은 거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평에서는 그게 게임의 규칙이 됩니다. 다행한 일이지요. 그는 제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몇 번이나 저에게 밝혀주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가 한 비평이 대부분 제대로 맞추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조가 왜 그리 신랄한 걸까요?

77. 알베르 까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까뮈-그르니에 서한집



 
2013-02-06

<결혼,여름> 알베르 까뮈
김화영 옮김, 책세상




까뮈의 바다.





 
2013-02-04  Modify Delete
친애하는 카뮈,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편지가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게 변함없는 우정의 증표를 보여주어 나를 자꾸만 놀라게 합니다. 내가 그런 우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인쇄되어 나온 당신의 서문을 다시 읽지 않는 것은, 분에 넘친 찬사일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의 생각이 당신과는 다르다 해도, 내가 당신에 대하여 느끼는 깊은 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35.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부르 라 렌, 1960년 1월 1일

까뮈-그르니에 서한집


이것이 마지막 편지. 까뮈는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서문'은 <섬>의 서문을 말하는데, 까뮈는 바로 전 편지에서 자신이 서문을 쓴 새로 나온 <섬> 판본을 보내달라고 말한다. 그르니에가 보낸 그 책은 까뮈가 죽은 후 배달된다. 그 책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고 한다.
"이제 이 책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라고 해야겠어요. 건강하시오. 19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






 
2013-02-04  Modify Delete
선생님,
저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해 유감스럽다고 여기는 때는 더러 있습니다. 젊을 때는 자신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굳은 결심으로 많은 시간을 바치면 결국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다가 마흔다섯 살에 이르고 보면 맨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상태, 또는 그 비슷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발전에 대한 믿음만 없어진 채로 말입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더불의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알량한 진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232.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루르마랭, 1959년 5월 26일

까뮈-그르니에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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