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3-05-20
나의 사랑스런 소녀여, 오늘 내가 소설에 썼던 모든 것은 그대에게 쓰고 싶어하는 억압된 욕망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양쪽에서 다 벌을 받았습니다. 내가 쓴 글은 아주 비참하고 그대에게는 그것 때문에 짜증을 내고 품위를 잃었습니다.

Nr.97 1912년 12월 17일 밤에서 18일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2013-05-11
그대여, 새벽 세시 반입니다.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나의 소설엔 너무 적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대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거의 주저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자연스럽게(그 장면을 묘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내게서 흘러나온 그 역겨운 장면으로 인해 내 손이 아직 더러거든요. 그대여 오늘 아무 소식이 없는 게 마치 우리 사이에 여덟 시간의 기차 여행이 두 번 있는 듯합니다. 나의 일요일 편지를 건네받았을 때 무언가 당황스런 일이 일어났나요? 글쎄요, 내일은 알게 되겠지요. 이런 안심 없이는 잠자러 가는 대신 차라리 밤새 방을 왔다갔다할 것입니다. 이제 잘 자요, 가장 사랑하는 이여, 그대에게 지나친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에게 성실하세요. 그리고 내가 그대의 방에 있는 사랑스런 물건처럼 그대의 것이라는 점을 아십시오.
그대의 프란츠

Nr.96 1912년 12월 16일에서 17일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2013-04-29
그 이야기는 좀 터무니없고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내적 진실이 없었다면(결코 일반적으로 확증될 수 없지만 늘 모든 독자나 청자가 새로이 인정하거나 부정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을 테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적은 분량(타자기 용지로 열일곱 쪽)에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결함이 있어 어떻게 내가 그대에게 이런 미심쩍은 선물을 증정하려고 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줍니다. 나는 그 짧은 이야기와 함께 나 자신을 부록으로 주고, 그대는 사랑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세요.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단편소설 <선고>에 대한 이야기,


 
2013-04-29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프란츠 카프카, 변난수 권세훈 옮김, 솔


몇 달 만에 다시 읽기 시작







 
2013-04-07


말이 반짝인다.



 
2013-04-06

황동규 <사는 기쁨>
문학과 지성사


좋다, 이 시집.



 
2013-04-06
사는 기쁨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

5
...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황동규 <사는 기쁨>






 
2013-03-30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는 파노라마가 가장 화려한 풍경을 자랑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뒤였다. 그러나 그 매력의 마지막 관객이었던 어린이들에게 파노라마의 매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매력은 어느 날 오후 소도시 엑스가 나오는 영사막 앞에 앉은 나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내 삶의 어느 때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에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올리브색 햇빛이 쏟아지는 그곳 미라보 광장에서 놀았던 적이 있다. 그러한 여행에서 진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먼 세상이 언제나 낯선곳은 아니고, 또한 그곳이 내게 불러일으켰던 동경이 언제나 미지의 세상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오히려 가끔은 집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동경일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아주 은은하게 모든 것을 비춰주던 가스등 불빛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50개의 사진들이 정확하게 두 개의 대열로 나뉘어 있는 포스터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나는 피오르드 해안이나 야자수에 비치는 불빛에서 저녁에 숙제 할 때 내 책상을 밝혀주는 기묘한 느낌의 어스름이 생기고 파노라마의 풍경에서 빛이 사라질 때도 있다. 그럴 때 풍경은 잿빛 하늘 아래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여전히 바람소리와 종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이저 파노라마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13-03-24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 잔 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이별 없는 시대
황동규 <사는 기쁨>

아주 오랜만에 산 시집. 칠십대 중반 노시인의 시집.




 
2013-03-24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것은 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헤매는 사람에게 거리의 이름들이 마치 마른 잔가지들이 뚝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움푹 패인 산의 분지처럼 시내의 골목들이 그에게 하루의 시간 변화를 분명히 알려줄 정도가 되어야 도시를 헤맨다고 말할 수 있다.
티어가르텐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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