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7-10-01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한쪽 다리가 기둥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서 몸을 지탱한다. 다른 쪽 다리가 뒤에서 휙 옮겨 온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다. 몸무게가 앞쪽 발볼로 쏠린다. 엄지발가락이 바닥을 밀어내면, 몸무게는 또 한 번 미묘한 균형을 찾아간다. 두 다리가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이 이러지면서, 탁, 탁, 탁, 탁, 보행의 리듬이 생긴다. 더없이 자명하면서도 더없이 모호한 이 보행이라는 주재는 어느새 슬며시 종교, 철학, 풍경, 도시 정책, 해부학, 알레고리, 그리고 애통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내가 걷는 길도 도로와 샛길을 합쳐서 구불구불 얼추 10킬로미터가 된다. 나는 힘들었던 10년 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불안이 떨쳐질까 해서였다. 그 후로도 나는 자꾸 이 길로 돌아왔다. 일을 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고 일을 하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생산 지향적인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덕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쉬는 덧, 심장이 뛰는 덕)에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갓,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수년간 걷기를 다른 일의 수단으로 삼아왔던 내가 걷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도 좋겠지만 한 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자리를 걷는 것도 가능하도, 좌석밸트에 묶인 채 전 세계를 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 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애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이다.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김정아 옮김, 반비


요즘의 유행을 따라 제목에 인문학이 붙었지만 원래 제목은,
Wanderlust : A History of Walking
방랑벽 : 걷기의 역사




 
2017-09-21

요제프 K는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K는 산책을 나섰다. 그러나 두 걸음을 채 내딛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묘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묘지의 길들은 매우 인공적인 모양으로 걷기 불편할 정도로 구불구불 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을 마치 물살에 실린 듯 매끄럽게, 공중에 살찍 부유한 채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미끄러져 갔다. 그는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갓 만들어진 어느 붕분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멈추어 설 생각을 했다. 그 무덤은그를 강하게 유혹했으므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도저히 속도가 양에 차지 않았다. 간혹 무덤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곤 했다. 여러 개의 깃발을이 펄럭이면서 서로 힘차게 겹치는 바람에 무덤의 모습을 가렸던 것이다. 기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축하하는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여전히 먼 곳으로 향하고 달려가던 중에, 갑자기 그는 똑같은 무덤이 바로 옆 길가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그 무덤을 지나쳐 버렷으므로 그는 서둘러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뛰어내리는 와중에도 길은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하고 있으므로, 그는 비틀거리다가 무덤 앞으로 무릎을 꿇은 채 쓰러져버렸다. 무덤 뒤에는 두 명의 남자가 양손으로 비석을 함께 치켜든 자세로 서있었다. K가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비석을 바닥에 쿵 내려 놓았고, 비석은 담처럼 단단하게 땅에 박혔다.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제 3의 남자가 나타났는데, K는 화가인 그를 알아보았다. 화가는 단추를 엉성하게 잠근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테 없는 벨벳 모자를 썼다. 한 손에는 평범한 연필을 들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그는 허공에 연필로 인물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화가는 그 연필로 비석 위에 작업을 하려고 했다. 비석은 매우 높았으므로 화가는 쪼그리고 앉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허리를 살짝 굽히기는 했다. 무덤이 그와 비석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데 그는 무덤 위로 올라서지는 않으려 했다. 화가는 발끝으로 서서, 비석의 표면에 왼손을 받쳤다. 특별히 능숙한 솜씨 덕분에, 화가는 평범한 연필을 가지고 황금색 필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썼다. '여기 잠들다-.' 모든 활자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돌 속으로 깊이 파였고 완벽한 황금빛이었다. 두 단어를 쓴 후 그는 K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비석에 적힐 글귀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K는, 화가가 무엇을 망설이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직 비석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는 다시 계속해서 비문을 적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모종의 장애가 생긴 것이다. 화가는 연필을 쥔 손을 아래로 떨구고, 다시 K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K도 그를 보았다. 그래서 그가 매우 심각하게 당황해하고 있으며,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마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까지 화가가 갖고 있던 모든 활기와 생명력은 사라져버렸다. 그 덕분에 K도 역시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모르며 서로 바라만 보았다.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흉측한 오해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 좋지 않은 순간, 묘지 종탑에서 조그만 종이 댕댕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가가 한 손을 치켜들고 흔들자, 종소리는 멈추었다. 잠시 후 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작게, 그 어떤 재촉의 기운도 없이 울렸다가 금세 중단되었다. 마치 종이 스스로의 소리를 한번 시험해보려고 한 듯이, K는 화가의 상태에 대해 너무도 낙담한 나머지 울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랫동안 훌쩍거렸다. 화가는 K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곧 자신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는, 계속해서 비석에 글자를 새기기로 결심했다. 화가가 다음 철자 최초의 획을 조그맣게 긋기 시작할 때, 그것은 K에게는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화가는 K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억지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글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고, 더구나 황금빛도 아니었다. 칭백하고 멀건 획이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지나갔다. 단지 철자의 크기만은 무척 컸다. 그것은 알파벳 J였다. 철자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화가는 솟아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덤으로 성큼 뛰어올라가 발로 흙을 쿵쿵 밟아댔다. 봉분 흙이 주변으로 튀었다. 그제야 K는 화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화가에게 용서를 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K는 열 손가락으로 흙을 마구 파헤쳤다. 흙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무덤은 이미 이 일을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단지 눈속임으로 지표면에 딱딱한 흙을 살짝 덮어놓았을 뿐이었다 표면의 흙을 걷어내자마자 경사진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던 것이다. K는 가볍게 빙그르르 몸을 돌리고, 등을 아래로 한 채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아직 머리를 목덜미 위에 둔 K가 칠흑 같은 심연을 행해 한없이 아래로 빨려드는 동안, 위에서는 그의 이름이 강렬한 장식체로 비석 위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 순간 황홀함에 떨며 그가 잠이 깨었다.
1914. E 145~147

<프란치 카프카 - 꿈>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1
배수아 옮김, 워크룸 프레스


그런데 지금 이 책 페이지가 중간에 뒤죽박죽  
제본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17-09-16
이어서.

예상보다 날카롭게 보여 깜짝 놀란다. 나는 아이가 나와 닮았으리라 생각했다. 아름다우리라 상상했다. 그러나 아이는 작고 마르고 점투성이에 머리는 모래색이다. 턱이 무척 뾰족하다. 눈은 나보다 더 어두운 갈색이다. 눈빝은 너무 솔직하고 또 너무 교할하다. 아이는 딱 한 번 탐색의 눈길로 내 드레스와 장갑, 슬리퍼, 스타킹에 놓인 자수를 본다. 그러고는 눈을 끔벅인다. 훈련받은 내용을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급하게 무릎 굽혀 인사를 한다. 인사를 잘해 내 기뻐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아이는 나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있다. 아이는 나를 바보라 생각한다. 그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난다. 나는 생각한다. <넌 나를 파멸시키려 브라이어에 온 거야.> 나는 앞으로 한 발 나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얼굴을 붉히지 않아? 떨거나 눈을 내리깔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는 내 시선을 되받고 아이의 손가락, 손톱을 물어뜯은 차고 단단한 손가락은 너무나 차분하게 내 손에 머물러 있다.



 
2017-09-14
나는 그 아이가 근처에 있다는 점과 아이에 대한 궁금증으로 밤새 자다 깨다 한 터이다. 삼촌에게 가기 전에 당장 그 아이를 보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것 같다. 마침내 일곱시 반경에 하인용 계단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스타일스 부인이 웅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 다 왔습니다.⌋ 내 방문을 똑똑하고 두드린다.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나는 벽난롯가에 가 선다.말할 때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까? 아이가 그걸 알아차리려나? 아이가 긴장해 숨을 죽일까? 나는 숨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몸에 열이 난다. 얼굴에도 피가 몰릴 것이다. 문이 열린다. 스타일스 부인이 먼저 들어오고, 잠시 망설이다 아이도 내 앞에 와 선다. 수전, 수전 스미스, 수키 토드리. 속이기 쉬운 아이, 내 인생을 가져가고 자유를 가져다줄 아이.

제 2부, 9장 316p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17-09-12


그리고 지난 번에 서울 갔을 때
유어마인드에서 산 <녹색광선>을 다 읽었지.




 
2017-09-12


핑거스미스,
산수도서관에서 빌림


 
2017-09-11
⌈스미스 양, 스미스 양 맞지? 네가 런던에서 새로 온 내 하녀로구나! 수전이라고 편하게 불러도 될까? 네가 브라이어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수전. 나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둘 다 좋아할 만한 점은 별로 없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너는 아주 쉽게, 아주 쉽게 해낼 것 같다. 정말이야⌋
여전히 뺨이 새빨개진 채로 모드는 고개를 갸웃하고 나를 거의 보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다. ⌈분명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가씨.⌋ 나는 랜트 스트리트에서 연습했던 일을 생각하며 치마를 쥐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몸을 펴자 모드가 웃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핑거스미스 Fingersmith>를 읽기 시작.
핑거스미스가 뭐지, 했는데 도둑을 의미하는 은어라고. 공간적인 배경은 런던, 시간적 배경은 초반 기차역에 앨버트 왕자의 서거를 애도하는 조기가 걸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보아 1800년대 말이 아닌가 싶다.
김태리가 맡았던 화자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아가씨인 모드는 자꾸만 김민희가 떠오른다.

세라 워터스,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번역을 한 최용준은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이력이 쓰여있네.



 
2017-08-30


사실은
다 읽었다.


 
2017-08-30
160.
"실은" 하고 말한 고바야시는 그 뒷말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쓰다는 곧바로 묻고 싶어졌다.
"실은 어떻다는 건가?"
"실은 얼마 전에 자네 부인한테 죄다 말해버렸네."
쓰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뭘 말인가?"
고바야시는 상대의 태도와 표정을 씹어서 맛이라도 보는 듯이 잠시 사이를 두며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겉으로 드러냈을 때는 이미 태도를 확 바꾸었다.
"거짓말이네. 실은 거짓말이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네."
?걱정하지 않네. 이제 와서 그 정도의 일을 말했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가? 그럼 이쪽도 진짜네. 실은 진짜야. 죄다 얘기해버렸네."
"바보!"
쓰다의 목소리는 의외로 컸다. 반듯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여종업원이 살짝 고개를 들고 눈을 이쪽으로 향하자 고바야시는 곧바로 그것을 소재로 삼았다.
"레이디가 놀라니까 좀 조용히 하게. 자네 같은 무뢰한하고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체면이 깎여서 못쓴다니까."
고바야시는 여종업원 쪽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도 미소를 지었다. 쓰다 혼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고바야시는 다시 곧 그 틈을 파고들었다.
"대체 그 일의 자초지종은 어떻게 된 건가? 나는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고, 자네도 얘기해주지 않았던 게 아닌가? 내가 잊어버렸나?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쪽에서 도망친 건가, 아니면 자네가 도망친 건가?"
"그거야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
"응, 나로서는 상관없는 게 당연하지. 또 실제로 상관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는 그렇게 안 될 거네. 무척 마음이 쓰일 거야."
"그야 당연하지."

<명암> 나쓰메 소세키,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7-08-22
2
전차를 탄 쓰다는 침울한 기분이었다. 꼼짝달싹 못 할 만큼 승객이 붐비는 전차에서 그는 손잡이에 매달린 채 오로지 자신의 일만 생각했다. 작년의 격심했던 고통이 생생하게 기억의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하얀 시트 위에 눕혀진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쇠사슬을 끊고 달아날 수 없는 개가 내는 듯한 자신의 신음 소리가 또력이 들렸다. 그리고 차가운 날붙이의 빛과 그것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 마지막으로 돌연 양쪽 페에서 한꺼번에 공기를 짜내는 듯한 엄청난 힘의 압박, 그리고 압박을 받은 공기가 눌리지만 수축할 수 없기에 일어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격심한 고통이 그의 기억을 덮쳤다.
쓰다는 불쾨해졌다. 갑자기 마음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다들 점잔을 빼고 있었다.
'왜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을까?'
아라카와 제방으로 꽃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발적으로 발생한 당시의 격심한 고통에 대해 그는 완전히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원인은 모든 상상 밖에 있었다.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웠다.
'이 육체는 언제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른다. 아니, 지금 바로 이 육체 안에 어떤 변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고있다. 무시무시한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해온 그의 머리는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뒤에서 와하고 밀어 떨어뜨릴 기세로 그를 앞쪽으로 밀어붙였다. 돌연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정신세계도 마찬가지다. 정신세계도 전적으로 마찬가지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본 것이다.'
쓰다는 무심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마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눈을 주위로 돌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전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눈길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쓰다의 생각은 그가 타고 있는 전차처럼 자기 자신의 레일 위를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삼일 전 한 치눅에게서 들은 푸앵카레 이야기를 떠올렸다. 쓰다를 위해 '우연'의 의미를 설명해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푸앵카레의 주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이 우연, 우연, 하는 이른바 우연한 사건이라는 건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짐작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난자와 어떤 특별한 정자가 만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필요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또 어떤 조건이 필요했는지 생각해보면 거의 상상이 안 갈 거네,"
쓰다는 친구의 말을, 단지 새롭게 주어진 지식의 단편으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자신의 신상에 적용해 생각했다. 그러자 어둡고 불가사의한 힘이 오른쪽으로 가야 할 그를 왼쪽으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그를 뒤로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그는 여태까지 한 번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의 견제를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무슨 일이건 자신의 힘으로 했고 무슨 말이건 자신의 힘으로 했음에 틀림없었다.
'왜 그 여자는 그곳으로 시집을 갔을까? 그건 자신이 가려고 마음 먹어서 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곳으로 시집갈 리가 없었는데. 그리고 나는 또 왜 이 여자와 결혼했을까? 그것도 내가 원했기에 결혼이 성립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때껏 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안 했는데. 우연일까? 푸앵카레가 말한 이른바 지극히 복잡한 원인일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전차에서 내린 쓰다는 생각에 잠긴 채 집을 향해 걸었다.

<명암>을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지막 작품. 마무리를 못하고 죽었다.
송태욱 옮김,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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