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7-02-19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는데
다른 한 권은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거라
커버가 없고
커버를 벗겨낸 표지에는 제목이 없다.
원래 표지는 어떻게 생겼지?




 
2017-02-15
거대한 공동화장실, 의무적으로 정해진 짧은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서, 참을성 없이, 때로는 애원하며, 또 때로는 윽박지르면서 10초마다 "하스트 두 게마흐트"Hast du gemacht(아직 멀었어?)라고 물어온다. 그럼에도 몇 주 안에 불편함은 주어들더니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익숙함이(모드가 그런 것은 아니고!) 찾아왔다. 이는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비로운 방식이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나치 위계의 어떤 단계에도, 어떤 문서에도, 어떤 "노동 회의"에서도 분명하게 계획되고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체제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비인간적인 체제는 자신의 비인간성을 사방으로, 특히 낮은 곳을 행해서 퍼뜨리고 확장한다. 저항이 없으면, 그리고 이례적으로 강인한 성격이 아니라면, 그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와 반대자를 부패시킨다.

...

라거나 가스실로 보내진 여성들의 잘린 머리카락이 수톤 씩 아무렇게나 전시되어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진열장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세월이 흘러 그 머리카락은 퇴색하고 상했지만 계속해서 방문객들에게 속삭이며 소리없는 고발을 하고 있다. 독일군은 이 머리카락들을 목적지로 보낼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이 특이한 상품은 독일의 몇몇 섬유기업이 구입해서 침대 카버나 다른 산업용 직물로 제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이 이것이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판매자, 곧 라거의 SS당국이 거기서 실질적인 이윤을 뽑아냈을 가능성 또한 희박해 보인다. 이윤을 얻으려는 동기보다 잔학한 폭력의 동기가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에 사용되었다. 나는 이것이 순전한 냉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재의 출처 때문에, 곧 그것이 짓밟아야 할 재료이기 대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쓸데없는 잔인함은 라거의 내부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주의의 근본적인 특징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에 대한 최고의 논평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트레블링카의 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과 지타 세레니의 긴 인터뷰(<암흑 속에서< 아델피 출판사, 밀라노, 1975)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두 문장 속엥 축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어차피 다 죽일 것이었는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뒤셀도르프 감옥에서 종신형에 처해 있던 슈탕글에게 작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질적을 ㅗ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이썽ㅆ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말로 하자만 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우용성이라고 하늘에 외치고 있다.

5. 쓸데없는 폭력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2017-02-15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차츰차츰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또 다른 하늘 아래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노예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온 솔제니친도 그 점에 주목했다.

장기 복역자들, 생존자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축하하는 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프리두르키pridurki거나 수감생활대부분의 시간 동안 프리두르키였다. 왜냐하면 라거는 절멸을위한 것이기 대문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다른 수용소 세계의 언어에서 프리두르키는 어떤 식으로든 특권의 지위를 획득한 포로들로, 우리 쪽에서는 프로미넨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

또 다른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존 던 John Donne은 "어느 누구도 섬은 아니다"(적절히든 아니든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라며, 모두에게는 각자의 죽음의 종이 울리고 기억할 만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타인과 자신의 죄 앞에서 그 죄를 보지 않도록, 그래서 느낄 수 없도록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히틀러 치하의 12년간, 보지 않는 것이 모르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공모와 묵인에 대한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무지의 장막, 곧 T.S. 엘리엇이 말한 '부분적인 피신" partial shelter이 우리 포로들에게는 허용되자 않았다.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고통의 바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수면은 해가 갈수록 거의 우리를 잠기게 할 정도로 차올랐다. 눈을 감거나 등을 돌리는 일은 소용없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바다는 온통 주위에, 수평선 끝까지 온 사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섬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일이었다.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은(더도 덜도 아니고, 여느 인간 집단에 있는 딱 그만큼 존재했다)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가책과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주위와 눈앞 그리고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 종, 곧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고통은 어떤 비용이나 노력도 필요치 않은, 무에서 생겨나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3. 수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2017-02-09
무스펠트를 심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선고를 내린 법정이 의심을 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판단 욕구와 판단력은 특수부대 앞에서 흔들린다. 당장 질문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우리를 안심시킬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운 폭발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왜 그들은 그 임무를 받아들였는가? 왜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원하지 않았는가?
...
우리가 알고 있는 저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다. 곧 즉각적인 죽음보다는 다만 몇 주라도 삶을(도대체 무슨 삶인가!) 연장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손으로 살인을 하진 않은 사람들이다. 반복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심판할 권한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라거에서의 경험을 한 사람도 그렇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할 수 있다면 수개월을, 수년을 게토에서 만성적 배고픔과 피로, 혼잡한 난리통과 굴욕감에 시달렸다고 상상해보라. 자신의 주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소식을 받거나 보내지도 못한 채 세상에서 잘려져 나갔다고 상상해보라. 결국에는 화물열차의 객차마다 80명, 100명씩 실려 무턱대로 미지의 곳으로 며칠 밤낮을 잠도 못자고 여행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러고는 결국 해독 불가능한 어떤 지옥의 별들 사이에 내던져졌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가혹하면서도 정확하지 않은 어떤 임무가 그에게 제안된다. 아니 부과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에게 생존이 제공된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진정한 베펠노트슈탄트Befehlnotstand, 즉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이다. 심판대에 끌려나온 나치주의자들과 그 후 (그들의 선례에 따라) 많은 나라의 전범들이 체계적이고 뻔뻔스럽게 들먹인 그것이 아니라. 전자는 즉각적인 복종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엄격한 양자택일을 의미하고, 후자는 권력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내부적인 일이었다. 곧 몇 가지 조치로써 경력에 피해를 입거나, 완화된 처벌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들에서는 최전방으로 보내짐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실제로 자주 그렇게 해결되었다).

...

룸코프스키의 이야기는 라거의 관라자들과 카포들에 대한 매우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이야기이다. 한 체제를 위해 일하고 그 체제의 죄에는 자진해서 눈감아버리는 하위 권력층들의 이야기이다. 서명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것에 죄다 서명을 하는 중간 간부들의 이야기이다. 고개를 가로젓지만 묵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내가 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 못한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2 회색지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2017-02-06
정신적인 명료함은 소수의 것이다. 또한 그 소수조차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과거나 현재의 현실이 그들 마음속에 불안이나 불편함을 불러일읠 때에는 즉시 그 명료함을 잃게 된다. 선의와 악의의 구별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 명료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서 냉담하게 현실 그 자체를 변조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속이는 사람도 있지만, 닻을 올리고 일시적으로든 영원히든 원래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면서 편리한 현실은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에게 과거는 무거운 짐이다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이나 당했던 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체는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지어내고 고친, 허위이지만 현실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어떤 장면으로 시작될 수 있다. 반복해서 그 장면에 대해 묘사하다보니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조차 진실과 허구의 구별은 점차적으로 그 경계를 잃게 된다. 결국 인간은, 덜 믿음직스럽거나 서로 앞뒤가 맞지 않거나, 입수한 사건들의 큰 그림과 양립할 수 없는 세부 사항들을 여기저기 갈고 다듬으면서 자신이 거듭 반복해온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고 만다. 처음의 악의는 선의가 되어버렸다. 거짓으로부터 자기기만으로의 소리 없는 이행은 유용하다. 선의로 속이는 사람은 더 잘 속이고 자신의 역할을 더 잘 연기하며 판사에게, 역사가에게, 독자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더 쉽게 신뢰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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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대적 복종과 위계질서와 민족주의에 맞게 교육되었다, 우리는 슬로건에 흠뻑 젖어 있었고 의례와 시위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에 유익한 것이 유일한 정의이며 대장의 말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배웠다. 도대체 우리에게서 뭘 바라는가?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우리와 같았던 모든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어떻게 기대한단 말인가? 우리는 부지런한 집행자였고 그런 부지런함 덕분에 칭찬받고 진급했다. 결정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자라난 체계는 자율적인 결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하는 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결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금지외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무능력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책임이 없으며 처벌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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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사람은 기억 못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또 그러는 데 성공했다. 기억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그는 배설물이나 기생충을 몰아내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로운 기억을 몰아냈다. ...... 그러한 진술들은 물론 거짓이지만 그 사람이 알고 속이는지 모르고 속이는지 우리는 구별할 수가 없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한순간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고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본다 해도, 그 사람 자신은 그 딜레마를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속이는 행위를 할 때 그는 자신이 맡은 인물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배우로, 더 이상 자기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1 상처의 기억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가해자의 기억


 
2017-02-05
나는 여기서 극단적 경험들, 곧 희생자들이 받았던 상처의 기억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기억의 기록을 지우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인들이 작동 중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적어도 피해자의 마음을 심란케 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마음 깊숙이 그 기억을 몰아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현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희생자와 압제자 사이에 놓은 역설적인 유사성에 주목하게 된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양자는 같은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덫을 준비하고 또 튀어 오르게 만든 사람은 오직 압제자 자신이다. 따라서 압제자가 괴로워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희생자가 괴로움ㅇㄹ 겪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다시 한 번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상처의 시간은 연장되며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는 - 우리는 그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데 - (인간의 형벌에 도움을 받아서든 아니든 간에) 가해자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을 영구화하기 위해 피해자에게도 평화를 주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철할자 장 아메리는 벨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겟ㅍ타포에게 고문당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 고문당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그를 무로 만들어 버린 데서 오는 혐오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첫 따귀로 이미 금이 가고, 이어지는 고문을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그에게 고문은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아메리, 그는 1978년에 자살했다.

1 상처의 기억,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2017-02-05
...... 이보다는, 왜 그랬는가, 범죄를 저지를 때 이들은 인식하고 있었는다, 하는 동기와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질문이나 기타 유사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 슈페어Albert Speer처럼 야심차고 지적인 전문가든 아이히만Adolf Eichmann처럼 광신적인 냉혈헌이든, 아니면 트레블링카의 슈탕글이나 아우슈비츠의 회스Rudolf Hoss처럼 근시안적인 관리든, 고문 발명가들인 보거Wilhelm Boger와 카두크Oswald Kaduk처럼 우둔하고 추악한 사람이든, 질문을 받는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정신적, 문화적 수준에 따라 크고 작은 오만함을 보이면서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그 답변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즉,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들(내 상관들)은 나보다 더 나쁜일을 저질렀다, 내가 받아온 교육과 살아온 환경을 감안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더욱 엄하게 했을 것이다, 등과 같은 답변이다.

1 상처의 기억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7-02-02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 대한 최초의 소식들은 격동의 해인 1942년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막연한 정보의 단편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전해온 소실들이 묘사하는 학살은 규모 면에서 너무나 방대했고, 극단적으로 잔인했으며, 복잡다단한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대중은 그 소식들이 전하는 엄청남 때문에 그 이야기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가 일찍이 죄를 지은 장본인들로부터 예견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많은 생존자들, 그중에서도 <살인자들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가르잔치 출판사, 밀라노, 1970)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시몬 비젠탈은 SS(나치 친위대) 군인들이 냉소적으로 포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걸. 아마 의심도 일고 토론도 붙고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거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맏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연합군의 과장된 선전이라고 할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거야.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생각('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거야")이 한밤의 꿈의 형태로 포로들의 절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거의 모든 생환자들이 말로든 그롤 남긴 그들의 기억 속에서든 포로생활을 하던 밤에 자주 되풀이되던 꿈을 상기한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제각각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한결같다. 집으로 돌아가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들을 안도하면서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꿈, 그러나 믿어주지 않는, 아니 들어주지도 않는 꿈이다. 가장 전형적인 (그리고 가장 잔인한) 형태로는 상대방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다. 이 주제애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희생자와 압제자 양쪽 다 라거에서 벌어졌던 일이-여기에 덧붙이자면, 비단 라거에서뿐만 아니라 게토에서, 동부 전선의 후방에서, 경찰서와 정신장애인 보호시설에서도 벌어졌다-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어서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지금부터라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I sommersi e i salvati> 서문
프리모 레비,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7-02-02


<백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7-01-22


아니지.
라고 기조는 말했다.
그건 바다라기보다는 강에 가까웠으니까, 강에 솥뚜껑처럼 커다란 기포가 터지는 지점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서,라기보다는 물 언저리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어. 누군가, 그 기포가 터지는 지점 너머로는 절대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어. 거기부터는 바닥이 낭떠러지라서, 완전한 절벽이라서, 도저히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보냐,하고 나를 포함해서 모두 차례차례 물속으로 들어갔어. 어차피 수면 부근에서 헤엄치는데 바닥이 무슨 상관이냐, 생각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팔을 저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기포를 지나고보니 정말 자른 듯이 낭떠러지가 시작되고 있었어. 앞으로는 자욱하고 거대한 물뿐이고 바닥은 보이지도 않아서, 나는 정말 겁을 먹고 말이지, 어느 사이엔가 강가를 향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어. 철벅철벅, 하고 헤엄치면서 뒤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물방개처럼 팔과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돌아오고 있는 거야. 눈물이 날 정도로 열심히 헤엄치는데, 물가에 가까워질수록 이대로 돌아가기는 억울하다고 할까, 분하기도 해서, 나는 도로 기포를 향해 헤엄치는 거야. 하지만 역시 기포를 지나고 보면 나도 모르게 강가로 되돌아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줄곧 헤엄치는데, 왠지 몇 번이나 이것을 되풀이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아니, 아니, 그날만이 아니고 그 전날 밤에도 그 전전날 밤에도 줄곧, 그러니까 줄곧.
그거 지금, 꿈 얘기지?
응.
뭐야, 하고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강냉이를 배부르게 먹은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무도씨, 하고 기조가 말했다.
사람은 언제까지고 헤엄을 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몇 번이나 그런 걸 되풀이하다가 체력이 떨어지고 머리에 치명적일 정도로 산소가 부족해지만, 어떻게 되는 거야?
가라앉겠지.
죽는 걸까.
죽는 거지.
기조는 입을 다물고 곰곰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무도씨, 하고 기조가 말했다.
어떡하지.
뭘.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랑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난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꿈이잖아.
꿈이래도, 있잖아, 사람들이 헤엄쳐, 난 힘이 빠져, 잠방잠방하다가, 가라앉아. 머리 위로 수면이 점점 멀어지고, 내가 가라낮은 자리에서 파문을 만들며 헤엄치는 내 다음 사람의 배가 보여. 글ㄴ데 그 사람도 결국 가라앉아.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사람이 많았다며.
응.
다른 사람이 지나가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사람도 가라앉으면, 하고 기조가 말했다.
그 다음 사람이 있겠지.
그 사람도 가라앉으면.
또 다음 사람이 오겠지.
언제까지.
졸려.
무도씨, 언제까지.
아무도 없을 때까지, 아닐까.
마지막 사람이 가라앉고 나면, 역시 물만 남을까.
남겠지.
흑, 흑, 흑.
왜 울어.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해서.
그런 걸 왜 생각해.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이상해?
이상해.
이상한가.
이상하잖아, 그건 꿈이고.
무도씨, 무도씨, 하고 기조가 말했다.
커다란 물만 남는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오뚝이와 지빠귀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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